09 하얀 거짓말 2

by 명경수



딸은 홍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잦은 통화로도 감당이 안 되는 그리움이 몰려오면 홍콩 행 비행기에 자주 몸을 실었다. 막내 손녀가 태어나기 전, 두 손자가 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나면 딸과 함께 등산이나 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뒤에 찾아오는 다양한 먹거리를 접하는 재미는 첫째 손가락에 꼽을 만하다. 다양한 민족이 혼재해 살기에 음식 문화도 잘 발달되어 있다. 홍콩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아마 세계 음식의 뷔페(Buffet)상을 앞에 두고 수시로 골라 먹는 재미가 여행의 가성비를 한껏 추켜세울 것이다.


“할아버지, 오늘 이야기는 뭐예요?”

아이들이 8살, 6살 때니 벌써 8년 전의 기억이다. 이 녀석들은 항상 잠들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말을 시작할 때부터 했으니 이미 수십 편이다.

“오늘은 결초보은(結 맺을 결,草 풀 초,報 갚을 보,恩 은혜 은)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야.”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위무자’라는 노인이 살았어. 그에겐 새 부인(첩)과 ‘위과’라는 본처의 아들이 함께 살았지. 아버지는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아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새엄마를 다른 데 시집보내라’고 했어.”
“그런데 아버지 병환이 더 깊어 지자 아들에게 말을 바꿔, ‘나를 묻을 때 새엄마도 함께 묻어라’고 했지.”
(중 략)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아들은 새엄마를 다른 데로 시집을 보냈어. 아버지가 정신이 맑을 때 남긴 말씀을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중 략)
“아들 위과는 진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는데, 위과의 군대는 막강한 적군의 공격으로 위태로워졌어.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전쟁터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묶어 매듭을 만들어 놓고는 사라졌지.”
(중 략)
“적군들이 말을 타고 공격하다가 묶인 풀에 걸려 넘어져 적장을 생포하며 위과는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어. 홀연히 사라진 노인은 그날 밤 꿈에 나타나 ‘나는 그대가 시집보내 준 새엄마의 친정아버지요.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내 딸을 살려주었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게 되었소.’ 하고 말했단다.”

이렇게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는 마음을 표현한 사자성어 란다.

약 15분 정도 이야기 하는 사이에 큰 손주는 눈이 초롱초롱 해지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러나 둘째는 벌써 꿈나라로 접어들었다. 못 다 들은 이야기는 뒷날에도 계속되었다.


“할아버지, 저 구름 속의 비행기 좀 보세요!”

며칠 후, 토요일을 맞아 딸, 사위와 두 손자들과 같이 ‘드래곤스 백(Dragon’s Back)’ 산을 등산하기로 하였다. 홍콩 섬 남동쪽에 위치한 해발 280m의 산은 완만하게 솟아오른 숲이 우거진 언덕길을 오르는 데만 1시간 반은 걸린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해안선의 드라마틱한 파노라마는 왜 우리가 정상에 오르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해발 제로부터 시작하여 돌부리가 그대로 노출된 능선길은 아이들에게는 힘든 구간이지만 사위는 아이들과 타협 없이 훈련시키듯 몰아간다. 준비한 것 이라고는 물 한 병이 전부이며, 내려가서 맛있는 햄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 뿐이었다. 투정도 하고 쉬자고 할 법도 하였지만 아빠의 말과 행동을 따르는 아이들이 대견할 뿐이었다.

정상에서 얼마간의 휴식 후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구불구불한 숲길을 걸을 때였다.
“할아버지, 구름 속을 나는 저 비행기 좀 보세요.”
“잠깐만 서서 멋진 경치를 보고 계세요. 우리가 부를 때 까지요.” 하는 게 아닌가.

사위는 먼발치에서 만족스럽게 아이들을 보고 있었고, 애들과 나에겐 약간의 휴식이 찾아왔다. 무슨 작전 계획이 있음을 직감하고 “그래, 너무 멋있다. 와~” 하며 시간을 벌어 주었다.
“할아버지, 이제 오세요!” 하고 형과 동생이 웃으며 손짓을 한다. 다가가니 “할아버지, 하늘의 비행기를 보고 오세요.” 힐끗 쳐다보니 길섶의 풀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풀에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하였다. 두 녀석은 양쪽에서 나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결초보은!” 하며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했다. 내가 속아서 넘어진 것과 애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 크게 기뻤다. 나는 두 녀석을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얼굴을 비볐다.

3시간가량 등산을 끝내고 나서 약속대로 샤우케이완(Shau Kei Wan)에서 햄버거와 과일 주스, 아이스크림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채웠다. 아이들은 힘든 산행 중 할아버지의 은혜를 갚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먹는 즐거움으로 한없이 기뻐했다.

가정교육이 별게 아니다. 어른들이 바른 생활로 모범을 보이면 그대로 닮아 가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감쪽같은 거짓말로 꾸민 퍼포먼스였지만 듣고 바로 실행해 보겠다는 손주들을 보며 보람이 배가되는 하루였다.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위한 이야기에도 정성을 더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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