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렇게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했으며 어느새 회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 지쳤던 걸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적기 시작한 나의 버킷리스트. 버킷리스트에 적은 것들을 보니, 회사를 다니면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버킷리스트를 위해 회사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건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민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현재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버킷리스트 중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제주도 한 달 살기. 몇 년 전 떠났던 제주도 여행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주도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몇 년 전 혼자 제주도를 여행했을 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번 한 달 살기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쳤고 그렇게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정하고 스텝 일을 하며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 스텝은 주로 20대 초반 친구들이 많이 한다고 알고 있어서, 처음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20대 후반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적는 지금, 게스트 하우스 스텝으로 지낸 지 보름 정도 지났는데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것! 당연한 소리지만 이번 계기로 다시 한번 크게 느끼는 듯하다.
내가 느낀 게스트 하우스의 장점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여행 온 게스트부터 부자, 형제, 가족끼리 여행 온 게스트, 커플 그리고 혼자서 온 게스트들까지. 게스트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 다음엔 또 어떤 게스트가 올지 기다리는 것도 재밌는 일상 중 하나이다.
이곳 게스트 하우스에 있으면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경계가 쉽게 풀어지는 것 같다. 함께 보드게임도 하고 이야기도 하다 보면 하룻밤 사이에도 정이 생긴다. 떠날 때 간식과 손 편지를 주고 가는 게스트도 있었고, 아쉬움에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게스트도 있었다. 게스트 중에는 흔하지 않은 취미를 가진 분들도 있다.
어느 날 저녁 게스트 한 분이 들어오시는데, 손에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카메라는 위장 무늬로 감싸져 있었다. 첫날에는 낯설고 어색해서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일까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다음날 조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새를 관찰하는 취미를 가진 분이셨다. 새들은 어떻게 길을 알고 따뜻한 남쪽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걸까?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새들은 자기가 지나왔던 바다의 냄새를 기억한다고 한다. ‘바다의 냄새...? 바다 냄새는 다 똑같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바다마다 냄새가 다르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뒤로 바다에 가면 나도 모르게 바다 냄새를 주의 깊게 맡아보고 있었다.
게스트들한테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제주도에는 언제 오셨어요? 오늘 뭐 하셨어요? 내일 뭐 하실 거예요? 매번 게스트한테 내일 뭐 하실 예정인지 여쭤보았다. 한 번은 “저 한라산 가려 구요”라는 대답을 듣고 “저도 갈래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게스트를 따라서 한라산 등반을 했다. 혼자라면 힘들었을 텐데 함께했기 때문에 정상까지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눈 덮인 백록담과 구름 위에서 보는 제주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처럼 정이 넘치는 게스트들 덕분에 나의 제주도 한 달 살기가 더욱 풍성해지고 좋은 추억이 늘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여행을 가면 항상 여유롭게 즐기고 오자고 다짐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면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진다. 그래서 매번 아침 일찍 분주하게 나가 저녁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곤 했다. 이전에 제주도에 왔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 한 달 살기는 여유롭게 제주도를 천천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습의 제주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맑은 날의 제주, 흐린 날의 제주, 바람 부는 제주, 비 오는 날의 제주 각각의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듯하다.
제주에 있으면서 쉬는 날에는 배낚시, 한라산 등반, 제주 바다 산책, 전시 관람, 관광지 구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한 달 동안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어딘가를 가야 하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하루하루가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는 미션처럼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숙소 앞에서 해지는 것을 마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더라. 잠시 쉬어가고 싶다면 힘을 빼고 여유로움 그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다.
나는 그날의 하루가 나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먼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행복이 중요하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그 하루는 소중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또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주도 한 달 살기는 해외에 나가기 전 준비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는 분명 설렘도 있었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걱정했던 것들은 정말 별게 아니었다. 여기에 와서 만난 사람들, 예쁜 풍경들, 제주에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 정말 많았다. 나는 제주에서 용기를 얻었다.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니라는 마음가짐, 그거 하나만큼은 제대로 얻어 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니라고.
2019.01.30 ~ 2019.03.11
'홍영은'님의 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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