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가장 나답게 :)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엄청나게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내성적인 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았고,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고군분투했었다.
그 결과, 나는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말이 곧 내성적인 내가 외향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요즘 말로 인싸(Insider)인 척 사회적 능력을 up 시켰을 뿐, 나는 여전히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니곤 한다. 물론 늘 혼자. 그 2주 혹은 한 달이 나에게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완벽하게 내성적일 수 있고, 그 누구의 감정에도 동요되지 않고 온전히 감성적일 수 있는 시간이다.
인싸(Insider)인 척했지만 실은 아싸(Outsider)이고, 인싸인 내 모습보다 아싸인 나 자신을 더 좋아하기에, 나는 떠났다. 온전히 나일 수 있는 곳으로.
이번 제주도 한 달 살기에서 자동차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나는 배를 타고 내 자차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모두가 만류했고 굳이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 했지만 자차를 가지고 가는 일은 정말 나다운 결정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10여 년 만에 배를 타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고, 심지어 성인이 되어 내 자동차를 싣고 간다는 것은 꽤나 주체적이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배 안은 오락실, 노래방, 영화관 등 생각보다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편도 4시간 30분, 왕복으로 9시간 정도 걸렸지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침 흘리면서 잘 잤다.
아무래도 난 비행기보다는 배가 체질에 맞는 걸까. 덕분에 제주도 안에서도 렌터카에 적응할 필요 없이 마음 편히 운전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제주도 기름 값이 너무 비싸 순간 당황했지만 말이다.
집순이인 내가 제주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숙소였다. 숙소를 선택할 때 나의 가장 큰 포인트는 인테리어, 보안 정도, 근처 편의시설, 청소 관리 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숙소였는데,
그래서 나는 감히 제주도 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하나 뽑으라면 단언컨대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큰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반짝이던 바다를 바라보던 순간'을 뽑을 것이다.
내가 지냈던 공감더하기 숙소는 방 한쪽 면 전체가 큰 창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무척이나 좋았던 곳이었다.
밤에는 외풍이 좀 있는 편이라 항상 커튼을 치고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 항상 가장 먼저 한 일은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창문 가득 들어오는 채광을 느끼며 그 날의 날씨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정말,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주의 에메랄드빛 바다. 차를 타고 굳이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숙소의 넓은 창을 통해 제주도 바다를 보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패턴이었지만 그것만큼 낭만적인 일도 없었다.
굳이 특별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더라도 나의 일상에서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이 제주도 한 달 살기의 큰 장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낭만은 제주도 바다를 귀로 듣는 것이었다. 도시와는 다르게 제주도의 밤은 저 멀리 등대 불빛만 있을 뿐 온 세상이 고요하고 적적한 어둠으로 덮이는데, 이때 숙소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곤 했다.
특히 창문을 조금 열면 내 귀 옆에서 파도가 찰싹찰싹 치는 것 같이 파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파도소리를 들으며 혼자 마시는 제주 위트 에일과 간단한 안주, 그리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거나 혹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노라면 새삼 내가 제주도에 와 있구나 라고 다시금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적당히 외부인 이면서도 제주도민 같던 순간. 다만, 조금의 애로사항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끼니 해결이 아니었을까. 제주도 한 달 살기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그래! 가서 나의 요리 실력을 맘껏 펼쳐보는 거야!’라는 당찬 포부로 가득했지만, 현실은 요리계의 마이너스 손으로 손만 대면 모든 요리가 저 세상으로 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저녁은 근처 국밥집에서 혼밥을 하거나 나머지 끼니는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씩 이마트에 가서 사 온 완제품 음식으로 해결했다.
하필 한 달 살기 일정 안에 설날도 껴 있었는데 막상 가족 없이 지내려니 생각보다 외로웠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명절 음식으로 달래고자 이마트에서 명태전, 산적, 새우튀김 등을 5~6개 담았지만 제주도 물가에 새우튀김 2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도 있다.
이와 함께 인상 깊었던 것이 날씨인데, 아니나 다를까 제주의 날씨는 굉장히 변화무쌍했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제주도의 바다는 그 날의 날씨에 맞는 그 날의 표정을 하고 있더라는 것을.
맑은 날은 '그래, 이곳이 제주도야!'라는 표정으로, 흐린 날은 '어때? 제주도 바다는 흐린 날도 느낌 있지!'라는 표정으로 , 비 오고 거기에 바람까지 부는 날은 '제주도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라는 표정으로, 제주 바다는 그때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날씨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비 오고 거기에 바람까지 부는 날은, 정말 제주도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숙소 창문이 덜컹거리고 파도는 도로를 집어삼킬 만큼 거세게 몰아쳤으며, 바다 바로 앞에 주차를 해 놓은 내 차가 혹여나 날아갈까 잠을 설치는 일도 많았다. 내 자동차 무게를 인터넷에 찾아보고 풍량이 어느 정도일 때 날아가는지 까지 찾아봤으면 말 다 했지.
물론, 집순이인 나이지만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바로 한라산 등정! 20년을 시골에서 자랐고 어렸을 때는나름 능선도 뛰어다녔던 아이였지만, 어느덧 누울 자리만 보면 일단 눕고 보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있었기에 걱정이 참 많았다. 하지만 한라산은 아싸인 나도 저절로 인싸로 만들어주는 신비한 곳이었다.
한라산을 오르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 힘내세요! ’였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 얼마나 남았어요? ’ 였으니까.
새벽 6시에 출발해 죽을 둥 말똥 올라 6시간 30분 만에 백록담을 보고, 무릎이 아작 나는 소리를 두 귀로 직접 들으며 4시간을 꼬박 내려와 장장 10시간 30분의 한라산 등정을 마쳤다.
등정을 마치고 손에 쥔 한라산 등정 인증서는 한라산이 나한테 장하다고, 기특하다고, 해 낼 줄 알았다고 칭찬해주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한라산 등정 빼고는 제주도 생활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보냈다. 한 달 살기 목표였던 ‘제주도민처럼 살 거야’처럼, 정말 날씨가 안 좋은 날은 당연히 방콕을 했고 날씨가 좋았던 날도 숙소 창문을 통해 한없이 바다만 바라보거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해안도로를 산책하곤 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내성적일 수 있고 온전히 감성적일 수 있었던 제주도의 한 달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했고 간절했고, 또 완벽했다.
우리는 살면서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늘 사회가 혹은 다수가 정답인 것처럼 그들이 세워놓은기준과 대세를 따라 그 기준에 충족되면 인싸이고,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아싸가 되는 요즘 세상에,
실은 아싸(outsider)란 본인이 무엇에 행복을 느끼고, 무엇에 안정감을 느끼고, 무엇에 살아있음을 느끼는지 알고 그런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2020.01.22 ~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