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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Aug 16. 2024

골프 연습장의 색깔 공

얼마 전부터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잘하고 싶어서 레슨이 없을 때도 혼자 연습장에 가곤 하는데, 골프 연습장에서 열심히 채를 휘두르다 보면 색깔 공이 빼꼼 나올 때가 있다.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색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노란색 공이 특히 시선을 끈다. 기계가 밀어 올린 노란색 공이 등장할 때면 마치 일출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흰색이 대부분인 골프공들 사이에서 이렇게 색깔 공이 나오면, 특히나 노란색 공이라도 나오면 스윙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이 공은 잘 쳐야지, 다른 곳으로 날려버리지 말고 가운데로 잘 쳐서 나한테 돌아오게 해야지, 그리고 기왕이면 멀리 날아가면 좋겠네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므로 여기저기로 날아가기 일쑤지만, 혹시라도 잘 맞았을 때의 기쁨은 남다르다. 의도한 대로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실력이 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흰색 공은 주지 못하는 그런 맛이 있다.


결국 요즘에는 아예 색깔 공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나 올라올까 저제나 올라올까. 옆 타석에서 누군가 친 색깔 공이 내 타석으로까지 넘어오면 그렇게 즐겁다. 이러다 보니 흰색 공을 칠 때는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자세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냥 휘두르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쩌다가 아주 멀리 날아가지 않는 이상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놀랍도록 효율적이라서 똑같거나 유사한 일들은 하나로 묶어 기억한다고 한다. 매일 회사 집 회사 집만 반복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날짜가 훅 지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뇌가 이런 날들을 하나로 묶어 통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이 얘기를 어딘가에서 처음 보고 최근의 내 얘기 같아 슬프면서도 깊이 공감했다. 쉽게 말해 기본적으로 올라오는 흰 골프공들은 하나로 묶어 ‘흰색 공을 쳤다.’로 기억한다는 것 아닌가. 흰 공(들)을 쳤다. 나의 효율적인 뇌는 그 힘들고 고되고 지친 하루하루를 ‘일상’이라는 이름의 흰 공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이 인간은 오늘도 흰 공을 쳤다.”라고. 


골프공도 색깔 있는 녀석만 기다리는 나인데 일상이라고 해서 다를까. 나의 하루하루도 저 색깔 공처럼 다채로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색깔’이라는 ‘특별함’이 한눈에 보이는 골프공과 달리 우리의 하루는 그렇지 못해서 오늘이라는 공이 색깔 공인지 흰색 공인지는 쉬이 알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날이 끝나고 잠드는 순간조차 특별한 날이었다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구나.’하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이라거나,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 같이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하루는 흰색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흰색일 것으로 추정되는 하루를 흰색 골프공처럼 대충 넘겨 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오늘 하루가 높은 확률로 흰색일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설령 오늘이 흰색이었다고 할지라도 흰색 골프공을 하나 대충 치는 것과 하루를 대충 살아 넘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다. 색깔 공임을 알 수 있으면 물론 좋다. 색깔 공으로 추정만 되어도 좋다. 그러나 색깔 공은 희소하기 때문에 이것만 기다리며 흰색 공을 대충대충 쳤다가는 색깔 공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습시간이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색깔 공을 치고 싶다고 연습시간을 그냥 날려버리는 것은 너무 미련한 일이 아닌가. 하물며 내 소중한 하루를?


수십 수백일의 흰색 오늘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는 말로 묶어 버리는 것은 너무 아쉽다.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똑같은 흰색 공의 모습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


흰색 공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드넓은 골프장에서 누가 친 공인지 구분해야 하니 각각의 공에도 다 특징이 있다. 프린트되어 있는 이름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어떤 공에는 이 방향으로 치라고 선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흰색이라는 색의 범주에서 보면 동일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색 공들 끼리도 다른 점이 선명히 보인다.  각각의 특별함이 그 안에 있다.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느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특별하면 좋을까? 하루하루가 늘 새롭고 짜릿하고 즐거울까? 아마 아닐 것이다. 특별함은 희소성을 근간으로 하고, 희소하기 위해서는 희소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희소한 것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특별한 무엇을 기다리기보다 매일 마주하는 것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면 흰 공을 치더라도 색깔 공을 치는 것 같은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제는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뚫고 어느 이름 모를 건물 밑으로 가 잠시 숨을 돌리는데, 얼마 만에 이렇기 비를 맞아 보았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비에 젖은 서로를 보며 웃다가 하늘을 보았다. 맑은 하늘 한편에 모여있던 먹구름 아래로 쏟아지는 비가 마치 햇살과 함께 내리는 것 같이 눈부셨다. 평소에 보건 나무들도 담쟁이덩굴도 유난히 생기 있게 반짝여 보였다.


어제 나의 흰색 공은 참 낭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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