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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Jan 16. 2021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들

 나는 재택근무를, 아내는 출근을 한 날이었다.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 망했다 눈 많이 와ㅠ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굉장한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감성 돋는 생각이 먼저면 좋았겠지만 며칠 전에 봤던 뉴스가 먼저 떠올랐다. 퇴근시간에 내린 기습 폭설로 도로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뉴스였다. 차를 끌고 출근했던 아내도 그 뉴스가 떠올라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눈이 한동안 더 내릴 것 같으니 차를 두고 퇴근하면 어떻겠냐 물었지만, 아내는 조심히 끌고 가 보겠다고 답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으나 다행히도 아직 도로가 눈으로 덮이지는 않았다.


- 차 끌고 올 거면 차라리 얼른 와


 근무 시간 조정이 잘 되었는지 아내는 지금 바로 퇴근하겠다고 했다. 집에 와서 재택근무로 일을 더 하더라도 눈 내리는 퇴근시간에 도로에 갇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그래도 이미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내는 잘 알겠으니 1시간쯤 있다가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 밖으로? 왜?

- 눈 많이 오잖아. 눈놀이하자!



 아내가 말한 1시간이 되기 전에 내 업무 시간이 끝났다. PC를 끄고 창밖을 보니 눈은 여전히 한창이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애도 아니고 무슨 눈놀이람, 하면서도 옷을 주워 입었다. 지엄한 명령에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집에서 그냥 바라만 보았던 지난번 눈이 아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도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테니 먼저 나가 눈 구경이나 하고 있기로 했다.


 아파트 놀이터는 이미 동네 꼬마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아이들은 춥지도 않은지 뛰어다니며 저마다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눈 공을 굴렸는데 저 거대한 공이 몸통이 될지 머리가 될지, 그 눈사람이 2단짜리가 될지 3단짜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더라도 제 창조주보다 더 클 것 같았다. 심지어 그들은 각자 굴리던 공을 합쳐 더 거대하게 만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눈덩이를 합친 아이들은 이내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이제 힘을 합쳐 보다 거대해진 공을 굴렸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아마도 아이들에게 끌려 나왔을 어른들이 장갑이라도 껴라, 목도리라도 하고 놀아라 소리 높였지만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놀이터 옆 주차장에서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분이 요즘 가장 핫하다는 오리 모양의 눈 집게를 들고 창작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손길로 탄생한 오리들은 자동차 위, 나무 옆, 동 입구 난간까지 여기저기를 채워갔다. 지나가던 주민들은 그녀가 만든 오리를 보고 너무 예쁘다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몇몇은 사진으로 담아가기도 했다.


 거대한 눈 공과 오리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뭐 하나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동해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쓸어 담았다. 장갑을 낀 손에 한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손에 눈을 쥐어본 것이 언제였나. 손에 담은 눈을 뭉쳐 둥근 공 모양으로 만들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내 흥미가 떨어져 덩어리가 되다 만 눈을 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틈에 주차를 끝낸 아내가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왔다. 아내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눈을 보더니 무슨 눈사람을 만들다 말았냐며 놀렸다. 그리곤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맨손으로 눈을 집어 둥글게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아내의 눈덩이는 금세 내가 만든 것보다 커졌다.


 그렇게 아내는 작은 눈사람을 뚝딱 만들어냈고, 그 눈사람은 난간 위에 있던 오리 옆에 자리 잡았다. 아내의 눈사람은 오리와 썩 어울렸다. 아내는 기뻐하며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잔뜩 신나 반짝이고 있는 아내의 눈빛은 놀이터에서 눈을 굴리는 아이들, 오리를 만들어내던 사람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눈을 진즉에 버린 뒤였다.



 저녁 시간이 되면서 눈발이 점점 약해졌다. 이 틈을 노린 어른들은 밥 먹으러 가자며 아이들을 유혹했고, 아이들은 놀이터에 예술작품 몇 개를 남긴 채 떠났다. 오리를 만드는 여인은 아직도 열심이었지만 아내도 배가 고파졌는지 이제 들어가자! 며 나를 잡아끌었다. 신나게 놀았는지 개운한 표정이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와 밥을 먹고, 다 하지 못한 업무를 끝낸 아내는 TV를 보는 듯싶더니 이내 잠들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종종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기분 좋은 꿈인 모양이었다.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도, 오리 여인도 오늘 밤 기분 좋은 꿈을 꾸겠지. 그런데 왜인지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엔 나도 눈사람을 좀 열심히 만들어 볼까. 그것도 아주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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