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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Apr 16. 2022

권위를 빌린 거절

생각하는 톱니바퀴(4)

 회사 내 다른 부서에서 업무 협조 요청 전화를 받았다. 내용을 들어보니 우리 팀에서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상황을 설명하고 거절하려는데, 단순히 일을 더 받고 싶지 않아 하는 실무자의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전화기 너머의 사우님이 본인의 리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희 상무님이 그쪽 상무님이랑 말씀을 나누시다가 협업을 해보하셔서 연락드리게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는, 뭐 이런 이야기였다.


 딴에는 상무님의 권위를 빌린 요청이었겠으나 그의 상무는 나의 직속 상사가 아니므로 그리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우리 상무님 이름을 꺼냈다고 해서 사실 확인도 없이 우리 팀의 일도 아닌 것을 받아줄 수도 없었다. 윗분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권 없는 일개 실무자 A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가 그의 직속 상사에게 보고할 수 있는 말을 제공해 주는 정도뿐이었다.

"유관부서 업무 협조는 리더분의 지시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아직 저희 상무님이나 팀장님이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요. 저희 팀장님께 말씀 한번 해주세요. 업무지시받으면 그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권위를 내세워 요청하면 나도 권위를 내세워 거절하는 수밖에.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처럼 상사의 권위를 빌려야 하는 순간들이 종종 생긴다. 상대에게 당하면 대응하기 참 곤란하지만 내가 써먹어야 할 때는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다. 하기 힘든 말이나 어려운 부탁, 까칠한 피드백이라 할지라도 그 말을 하는 내가 밉고 불편하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전달하는 사람이기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 상무님께서 이 부분이 별로라고 좀 고치자고 하셔서요... 팀장님이 이 업무는 책임님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셔서요... 내 뜻은 그게 아닌데 미안하게 되었다... 뭐 그런 얘기들.


 그런데 이 '권위 빌리기'는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오너가 되지 않는 이상 보고의 대상인 상사는 항상 존재하겠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면 어떤 안건에 대해서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알아서 판단하고 진행해."라는 말은 무섭고 무겁다. "믿는다."는 말까지 나오면 더욱 그렇다. 더 이상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재량껏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지만 이는 곧 그 일과 관련된 결정에 대해서는 온전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영역의 최고 의사결정권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는 누구의 권위를 빌려 요청이나 거절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순간부터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더 깊이 고민하고 신중히 결정하게 된다. 결정권은 책임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결정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누구의 권위도 빌릴 수 없다. 이건 회사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마찬가지다. 어렸을 땐 부모님의 권위를, 학생일 땐 선생님의 권위를 빌릴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누구의 권위도 빌릴 수 없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권위를 빌릴 선생님 자체가 없고 이 나이에 부모님을 찾으면 마마보이 소리가 절로 나겠지.


 누구의 권위를 빌려 요청이나 거절을 할 수 없게 된 어른모든 의사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 설령 하기 싫은 일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자기 행동을 자기 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의 권위를 빌려서 하기 싫은 일을 거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책임지기에 세상은 아직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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