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대청소 차 피규어들에 쌓인 먼지를 털다가 문득, 이것들을 다 팔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겐 피규어를 사모으는 취미 같은 것은 없었다. 대부분 선물을 받거나 어쩌다가 하게 된 뽑기에 성공해서 생긴 것들이었는데 이것저것 쌓이다 보니 딱히 통일감이 있지도 않고, 가끔 피규어 샵에 가도 구매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다 나오니 이 컬렉션들이 더 화려해질 일도 없었다. 그저 장식장 한 칸에 크기별로 나열해 두고 가끔 청소를 하다가 먼지를 털 때나 한 번씩 보는 것. 아마추어 수집가조차 되지 못하는 내가 피규어를 즐기는 방식이라고는 이게 전부였는데 이를 위해 굳이 이렇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모여있는 피규어들 중 상대적으로 퀄리티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꺼내 먼저 팔아보기로 했다. 친한 친구 A와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때 뽑아온 것들이었다. 이 캐릭터들이 나오는 만화를 더 좋아하는 것도, 피규어를 열심히 모으는 것도, 하루 일정을 마치고 마신 맥주 한잔에 흥이 올라 뽑기를 하러 가자고 한 것도 모두 A였으나 그는 아무것도 뽑지 못했다. 정작 피규어를 뽑는 데 성공한 것은 별 감흥도 없던 나였다. 평소에 이런 뽑기에는 젬병이었던 나는 그날 무려 3개나 뽑았더랬다.
숙소에 돌아온 뒤 A는 내심 내가 뽑은 피규어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그 여행의 계획을 A가 거의 다 짰기 때문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던 터라 잠시 갈등하기는 했지만 "나는 피규어를 모으지도 않고 이 만화도 네가 더 좋아하니까 이 것들은 너 가져."같은 훈훈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훈훈함보다는 뽑기에 실패한 A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 반, 처음으로 괜찮은 퀄리티의 피규어가 생겼으니 이걸 계기로 나도 피규어를 모아봐야겠다는 생각 반 때문이었다. 결국엔 이때 뽑아온 이후로 컬렉션에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때는 그랬다.
찍은 사진을 당근 마켓에 올렸더니 며칠 후에 구매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 피규어가 정품인지, 정품/가품 여부를 모른다면 상자는 남아있는지 정도만을 물어본 뒤 구매의사를 확정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구매자는 이 피규어에 얽힌 나와 A의 추억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만 오천 원. 그와 내가 이 추억의 피규어에 책정한 금액은 그저 이만 오천 원이었다.
거래하러 나가기 위해 피규어를 상자에 담고 있자니 기분이 괜히 묘했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것들인데 막상 팔려니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이 피규어들을 그때 A에게 주었으면 어땠을까. 생색도 좀 내고 고마움도 표시할 수 있었을 텐데. 피규어들 입장에서도 우리 집보다는 A의 집에서 같은 만화 속 등장인물들과 모여 있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따위의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이 피규어를 판다고 해서 A와 있었던 추억을 팔아버리는 것이 아님에도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했다. '아니 그렇다고 이것들을 언제까지 자리만 차지하게 둘 순 없잖아?'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거래를 마친 뒤에도 한참이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비싸게 팔지도 않은 거 차라리 팔지 말고 지금이라도 A에게 줄걸 그랬나. 그래도 몇 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다가 이제와서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A가 나쁜 일을 당했거나 연락이 끊긴 것도 아닌데, 정작 A는 저 피규어를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혼자서 무척이나 아련했다.
좀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핸드폰 속 갤러리를 열었다. 거래를 위해 찍어둔 사진까지 다 지워버리고 아예 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고 나서야 이 찝찝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추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지금 없어진 거구나. 그동안은 청소를 하면서 한 번씩 떠올랐는데 앞으로는 빈도가 줄어들 수도 있겠구나. 그 기회가 줄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서 내 마음이 이런 거구나. 여느 중고거래였다면 거래가 끝났으니 사진도 바로 지워버렸겠지만 이 사진은 한동안 남겨두기로 했다. 사진이라도 남겨둬야 가끔이라도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겠다 싶어서였다.
추억은 종이에 쓰지 말고 마음에 쓰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나는 워낙 잘 잊고 까먹으니 마음에 써두는 것 외에도 이렇게 글로, 그리고 사진으로도 남겨둬야겠다. 마음에 써둔 추억이 어디 갔는지 흐릿해질 때면 적어둔 글과 찍어둔 사진이 책갈피가 되어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