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준비물 | 털장갑, 삽, 따듯한 라테, 화병
“선생님 제가 ADHD 인 것은 알겠는데, 정말 우울증이 맞는 건가요..??”
시대를 잘 탄 건지, 몰라도 될 것을 알아버린 건지, 기술의 발전으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는 건지..
아무튼간에 난 작년 연말 성인 ADHD 진단을 받았다.
내 인생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천성이 정이 많고 상대의 감정에 빨려 들어가듯 동화되는 성격 덕분에 상대의 눈만 봐도 그의 진심과 열정을 느끼곤 하는, 대표적 ‘INFP’ 인간.
강하지만은 않은 멘털의 소유자로 0 공격 1 타격을 받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엔 진단을 받은 지 1년이 조금 덜 되었고 그동안 나는 거진 매주, 길어야 2주의 텀으로 약의 복용량과 종류를 조절하고 있다. 약이라는 것이 양면성이 있다 보니 구원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부작용에 대항해 가는 기간은 정말 외로운 싸움이다.
특히 PMS(월경 전증후군, 월경이 시작하기 1주 또는 2주 전부터 있어지는 기분장애 등의 불편감들을 통틀어 이른다. 조금 더 심한 경우를 PMDD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기간인 2주간은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무기력하다.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의지가 없으니 일상적인 것조차 에너지를 내기가 힘들어졌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스스로를 수차례 목도했음에도 여전히 묻고 싶다.
선생님 제가 갑자기 왜 우울증인가요?
저, 정말 우울한 게 맞나요?
아직 많은 경험을 한 것도 대단한 고생을 한 것도 아닌데 원래 이 시기쯤 다들 목숨이 걸린 것처럼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나?
스물여섯에 벌써 기력이 소진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모두가 나 같다면 어째서 동일한 조건에서 나만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반대로 남들은 나 같지 않다면 왜 나에겐 이런 페널티가 있어야 하는 건지
- 타인에게 나의 힘듦을 인정받으면 마음이 편할까, 누군가 나의 힘듦을 증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니, 남이 뭐래도 내가 힘들 땐 힘들다고, 내가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날 지켜오지 못한 너무 긴 세월 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참 아프다.
지금 내가 손쓸 힘이 없게 무력하도록 방어막이 뚫려있다. 시작점도 결정적 계기도 수 없이 찾으려 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어차피 난 이 과정을 지나가야 하니까.
지나쳐야만 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뿐,
되려 내게 상처가 됐던 기억들을 지금 여기서 헤집는다면 부실한 방어막 사이를 뚫고 부정적인 생각과 기운들에게 잡어 먹힐 테니까, 그게 너무 두려운 것 같다.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돌아봐야 하겠지만
이 또한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년시절 특수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것도 아닌데 늘 스트레스성 두통이 있었다는 단서가 보인다. 그때도 지금도 난 세상이 내게 마이크볼륨을 조금만 줄여줬음 한다. 나중에 와서 알게 되었는데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HSP(매우 예민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어)라고 칭한다고 했고, 이들이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이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 객관적 사실임을 입증됨을 알게 된 그 시점에 난 세상이 나를 처음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듯한 느낌까지도 받았다.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상상력은 자연스레 예체능 쪽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흘러갔고, 복잡하고 모호한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이라는 아이만이 모두 받아주는 듯했다.
그렇게 글과 그림을 통해 나를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엔 한 고마운 친구의 응원으로 디소 늦은 시기에 미대입시를 준비하여 대입에 성공했고, 2024년 7월, 나는 처음으로 정식으로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내가 받은 정신과적 진단결과와 내가 느끼는 우울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렇게 2024년의 문을 닫아가는 10월, 나는 페널티 3종세트 "ADHD+INFP+HSP"를 받아 쥐었다.
생각의 폭풍 속에서 다짐들을 써 내려가며 어디선가 나와 같은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전우들에게 애잔함을 가득 담은 눈빛도 쏘아 보낸다.
때론 정말 사소한 일로도 처참해지지만 우선 난 모든 것을 감싸 안아 들고 다음 신호를 향해 뛰어가보려 한다. 걸어서라도 기어서라도 가보려고 한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삶은 나를 놓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