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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해 Oct 27. 2024

1장 <바람이 새니까>(end)

1-3 준비물 | 플레이리스트, 이어폰

날이 추워졌다.


냉동피자와 아사하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길, 오뎅팔고 호떡 파는 작은 슈퍼를 보면 더욱 좋다.


시간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바람은 담배냄새보다는 차가워졌다. 이왕에 겨울 냄샐 맡는 거, 배고픈 겨울이면 더 좋다. 모르는 직장인 담배연기 냄새도 함께하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때 열 뼘 남짓 되는 꼬마의 머리칼을 스친 바람이 나에게도, 나의 가슴을 통과하는 짧고 굵은 통로를, 거길 포착하는 길목을 걷는 나의, 마음 굴 벽을 스쳐간다. 스치는줄 알았지만 들락거려서 코 뿌리가 시큰하다.


겨울밤 아빠의 손길을 떠나 홀로 창문의 금을 막으려 붙여둔 투명한 테이프가 생각난다.


겹겹이 쌓인 지점이 노란빛을 내기는 해도 틈새에 새어 들어오는 냉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빠가 그랬다.


뾰루지는 고름이 다 빠져나오고 그 뿌리까지 다 짜내 뽑아버려야 빈자리에 다시 두세 번째 것이 나지 않으니, 괜찮으니 당신 등에 있는 그것을 피가 나오도록 짓이기라고.


내가 마저 하지 않았던 일은

나의 등에 핀 슬픔의 심지를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그럴수록 가을과 겨울을 나는 나의 심장은 문 틈 사이 바람에 발가락을 오므리고 손을 말아 쥐고 겨드랑이 밑에 끼웠고,


여름이 오면 녹아내려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나의 삶에 생채기가 좀 많아도

불평 않기로 한 약속을

다시금 되뇌인다.


그렇게 구르고 견딘 대신

이렇게 행복한 지금을 선물받았으니,

기꺼이 풀어주었으니 약속해,

나의 행복을 위한 결정인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나의 병이 진단명이 아닌 성격으로 정의되는 세상이었다면,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람들 중에서도 무척 성실한 편에 속했을 거라고.


슬픈 마음 다 닳아 흔적이 겨우 남을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바람을 맞으며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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