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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수의견 Jul 15. 2022

온유 meekness

주님이 들려주신 답변

신비에 이끌리듯 잠에서 깬 고요하고 평온한 아침.

잠들기 전에 번뇌는 온데간데없이 오랜만에 평온을 찾은 마음으로 깨어났다. 잔영으로 남아있는 꿈을 되짚어 보았다.


한 여인이 있는데 명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아주 익숙한 사람. 한참 동안이나 대화할 수 있고, 나의 이야기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 앉아서 아이들과 노니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니 마치 푹신하고 부드러운 앙고라 스웨터에 얼굴을 묻는 것과 같이 안락하였다.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엔 반가운 미소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 사랑인데... 인생을 사랑하며 살길 바라지 않았던가?


꿈에서 깨자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 '온유'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일상적으로 잘 쓰지도 떠올리지도 않는 단어. '온유'. 이 단어가 어쩜 그리 선명하게 떠오르고 잔영을 남기던지...


성경에도 많이 언급되는 이 '온유(溫柔)'라는 단어를 찾아봤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온유... 우리말 사전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정의되지만, 히브리(유대어) 성경에는 아나브(עזו). 대답하는 사람. 즉 '종'을 뜻한다. 이에 대응하는 헬라어(그리스/로마어)는 ‘프라우스(praus)이다. '온순하게 길어 들어진 말'이란 뜻이다. 역시 영어 성경도 'Meekness', '순하다. 순종하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단순히 부드럽고 착하다란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감내한다.'란 뜻이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가 펄떡이고 날 뛸 때, 주인을 받아드리고 그 손길에 의해 "진정" 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온유하지 않음은 굴복하지 않고, 꺾지 않는다란 것인데, 이를 성경에서는 '목이 곧다'라고 표현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목이 곧은 자(=꺾이지 못하는 자)는 마음과 귀가 열리지 못해 듣기 싫어하니, 저만 말하려 든다. 그 심성이 온유의 반대되는 것이니, 자만, 교만, 거만이 그에 상응되며, 드러나는 형태는 성내고, 사납고, 난폭하고, 격정적이고, 완악하여 인내력이 없는 상태가 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13:4-8)


위 구절을 반대로 하면 '사랑이 없는 자는 시기하며, 자기 자랑하며, 교만하며, 무례하며, 자기 유익만을 쫓으며, 성냄으로 악한 것을 끌어드리며, 진리에 관심이 없어, 모든 것을 의심하며, 어떤 것도 인내하지 못한다.' 아니겠나?


우리에게서 온유가 없다면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에 자기희생과 인내를 바칠 줄 모르는 사람. 겸손을 몰라 자기 낮춤을 모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사람. 즉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온유가 없고 겸손을 모르는 자는 성령, 즉 주 그리스도의 을 모르고 마귀에 휘둘리는 사람인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누구보다 하나님께 굴복하여 자신을 꺾어 보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러므로 겸손과 온유함이 곧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요, 교만과 자만이 사탄에 영역이다.


온유함이 단지 순종하는 나약함일까? 아니다. 악심의 발동을 절제하고, 선심을 품어 자신을 통제하는 심성이 바로 온유함이다. 결국 온유한 사람이란 서번트쉽이 발달된 소위 에코이스트, 코디펜던트라고 불리는 사람의 전형을 설명하는 것이다. 온유하여 타인에게 감사할 줄 알고,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익힌다. 그리하여 결국 온유한 사람이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성공도 하게 되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한 자를 극단적이지 않고 중용에 가까운 자. 자기를 통제하는 자라고 설명했다.(2)


즉 온유는 강한 것을 잠재우며,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끝까지 이기고 난 사람에게 드러나는 성품이요, 그것은 인내에 의해 길러진 통제와 자기절제를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낼 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정당한 정도와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통제하에 있는 힘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부풀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주장하는 걸 삼가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최대한 각광을 받기 위해 자기 모습을 꾸미려고 계속 애쓰는 대신,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1)


그들은 종이 아니라 주님에게 쓰임 받기 위해 머리 숙여 주님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며, 겸손한 자를 종놈이라 비웃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라 여기는 목을 곧게 든 자들은 실상 자기 정체성도 없는 가짜 인격(페르소나)을 뒤집어쓴 사탄의 종이다. 진정으로 사랑받고 사랑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다면 먼저 온유함을 배우고, 종에게 머리 숙이는 겸손함을 보이고, 주님에게 귀의하여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다. 주님은 들으려 들지 않고 고집만 피우는 목이 곧은 자들의 최후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언 29:1)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사정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프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F.Hauck/S.Schulz).

출처 양시영 내과의원


참조. 온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숨은 뜻

참조. 이동휘 목사 컬럼 8복

(1)인용. 성경주석

(2)인용. 프라우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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