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1 그날의 메모들
1.
오만한 인간은 무기력함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며 언제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몸 깊숙이 무기력함을 심어놓았고 그것은 꿈틀대며 우리를 집어삼킬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 오직 멈춰 선 사람만이 이 금단의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다.
나는 최후를 대비해 글 쓰는 일을 아껴두고 있었다. 글쓰기는 무기력함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처방이다. 내가 지금 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 것은 그만큼 위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 좌절된다면 더 이상 희망을 걸 곳이 없다.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거나 허벅지를 꼬집거나 뺨을 치거나 허공에 발길질을 하거나 고함을 질러대도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벗어날 틈이 보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2.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 지 3일째.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오직 변기를 쓸 때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잠은 짧게 자고, 하루에 여러 번 잤다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몸 주위로 한기가 맴돌고 있어서 이불을 둘러싸고 왼쪽으로 돌아 웅크린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면 몸을 더욱더 움츠리게 된다. 외로움이 격해질 때면 핸드폰을 켜고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과, 그렇지 않은 남들을 비교할수록 도태되었다는 느낌이 강해지고 더욱 무기력해지기만 한다.
유일하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고통뿐이다. 고통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몸을 점점 더 경직되게 하며 죽음으로 내몰아가고 있다. 굳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꿈틀대고 있다. 죽어가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다.
3.
도로 위로 차가 달리고 있는 모습, 사람들이 웃어대는 소리, 거리 위로 뿜어져 나온 가로등 불빛과 같은 것들마저도 너무 강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내 몸은 굳어버린 바위와 같아서 이 모든 자극은 나를 가루 내버릴 것만 같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은 여전히 스산하고 어지럽다. 지나가는 차에 몸을 던지고만 싶다. 하지만 더 이상의 큰 자극 없이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까? 자살 역시 역동적인 사람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모험일 것이다. 죽음 뒤에 나는 평온해질 수 있을까? 원래 존재하지 않던 상태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나더러 유약하다고 손가락질하던 그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 자들도 언젠가는 몸이 둔해지고 움츠러들고 굳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앞서 경험하고 깨달았을 뿐이다.
4.
내가 불편하다면, 혹은 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두려움에 질린 것이다. 쉼 없이 달리던 것을 멈춰 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세계의 판도는 거꾸러져서 빠른 속도와 막대하게 큰 숫자가 아니라, 게으름과 비워짐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는 처음부터 게으름과 비워짐에 익숙했던 사람이 아니다. 흘러오던 내 삶이 저지당하고 유약해지고 굳어진 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다. 하지만 그 계기라 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나, 명확한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 이어져 내려온 삶 가운데 변화와 혼란이 몰아쳤던 일정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빛이 지배하고 있는 시간에서라면 우리는 가려진 부분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빛이 쇠락하기 시작하면 빛과 그림자 간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지고 언젠가는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그림자는 어둠이 되고 어둠이 닿지 못하는 몇몇 부분을 가리켜 빛이라 부를 것이다.
내 삶 가운데도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던 순간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나는 대학교 합격증을 확인한 이후부터 줄곧 게을러져 왔다. 처음에는 달음질하던 것을 멈추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게으름을 자체로 긍정하고 향유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어둠이 되었고 어둠은 내 삶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5.
‘게으름’과 ‘무기력함’은 뉘앙스가 서로 많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둘을 아예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둘 모두 느림, 경직, 비움의 이미지를 공통된 뿌리로 삼고 있지만 게으름은 스스로가 허락하는 것이고, 무기력함은 우리가 거기에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게으름이 그림자라면 무기력함은 어둠이다.
대학 합격증을 받은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게으름’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금의 이 나날들은 ‘무기력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나는 현재 온몸이 어둠으로 뒤덮여 자그마한 몇몇 불빛들만이 남은 상태다.
어둠은 점차 짙어가고 불빛들은 시들어가고 있다. 때로는 새로운 불씨들이 피어나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꺼지기 마련이다. 굳어진 몸을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해줄 희망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고 있다.
6.
나는 이 자리에 멈춰있다.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 둘,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재회의 순간이 오더라도 이미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남은 형상들은 세상에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
나만 남은 이 순간, 이 자리는 정말 아무도 없다. 아무런 기척도, 향기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막함, 막연함, 허무함, 쓸쓸함만이 감돌고 있다.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공간에도 환대받지 못할 존재다. 내팽겨진 몸으로 텅텅 빈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 자리에 머물러도 될까? 나는 더 이상 뛸 수가 없고 이곳에 홀로 남아서 쓸쓸한 종말을 맞이할 것 같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눈에서 때때로 가려져 있을 뿐이다.
하루는 잠결에 꿈을 꾸었다. 혼자 스산하고 어두운 새벽의 해안가를 걷는데 저 멀리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열심히 쫓아가 그 사람의 어깨를 툭툭 쳤고 뒤돌아본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자가 되어 관찰한 스스로의 모습은 무겁고 진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얼굴은 미소를 띠었는데 한 사람의 얼굴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반된 느낌을 자아냈다. 그 표정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가볍고 거짓되고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E01. 삐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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