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2 곁을 걷던 아이
내 몸은 가냘프고 작기만 하다. 신경은 곤두서 있고 희미하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려댄다. 눈은 벌게져 있고 그 아래로 그림자가 널찍이 드리워져 있다. 나는 밝은 사람이 아니고 그리 건강한 사람도 아니다. 종종 맨얼굴을 감추고 썩 괜찮아 보이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꾸며낸 것과 주어진 것을 가짜와 진짜로 구분 지어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 둘을 깔끔하게 잘라버리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마치 빛과 어둠이 늘 붙어 다니듯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그 둘도 단단히 엉켜버려서 떨어뜨릴 수 없지 않을까?
정해진 결말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바로 늙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고통과 묵묵히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만이 늙어갈 수 있다. 나는 점차 고통에 무뎌지고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가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앞을 배회하는 노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양손을 위로 모아 전신을 일직선으로 만들고 항상 정해진 구간을 왕복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 위쪽으로는 날카로운 눈초리가 띄어져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홀로 남겨진 시간 속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었다. 밤이었고 사람은 없었다. 길고양이가 서로 다투는 소리가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들렸다. 나선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옥상에 올라섰을 때 성가신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일대는 재개발구역이다. 조만간 이곳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내려와 욕실에서 옷을 내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선 허기가 들어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말라가는 방울토마토를 한 움큼 집어 물로 헹군 뒤 선 채로 다 씹어 삼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다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곤두서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이명이 들렸다. 균형을 잃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누워 잠에 들었다. 요 며칠 청했던 잠자리 가운데 가장 고요하고 평안했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지만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안개가 낀 해변에서 어린 시절 그 노인처럼 두 손을 위로 모으고 같은 자릴 왕복해 거닐었다. 한 아이가 옆으로 와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아무런 생각도,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하던 일을 이어서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나와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대여섯 번쯤 오가길 했을 때 아이는 멈춰 서더니 내게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고는 저편으로 뛰어갔다.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려서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눈가가 젖어 있었다.
“오늘까지 비워주시기로 한 겁니다. 더 미루는 건 안돼요.”
오늘이 이삿날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던 터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누군가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려댔다.
“이삿짐센텁니다. 여기가 성현동 87번지 맞죠? 이연우 님?”
네, 하고 대충 옷을 걸쳤다. 문을 열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 많던 가구와 책들을 능숙하게 끄집어내 트럭으로 날랐다. 나는 꿈속에서 본 아이가 누구였는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있어 집이 비워가는 걸 관망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로 이사 온 오피스텔 집에 누워 있었다. 날이 저물어 컴컴했지만 조명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본 아이가 마음에 자꾸 걸려서 다시 잠에 들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작스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낯선 환경 때문인지, 지난 집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꿈속의 아이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울먹임이 잦아들 때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위로 모으고 좁은 방안을 거닐었다. 어둠 속 정리하지 않은 이삿짐들에 몸이 여러 번 부딪혔지만 아픈 것도 모르고 멈추지 않았다. 탈진해 다시 잠에 들 때까지. 하지만 그날 꿈을 꾸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꿈속에서 그 아이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E02. 움찔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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