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송현동에서 청와대까지
금단의 땅을 밟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대체로 금단이라고 하면 일반 시민이 갈 수도 없을뿐더러 무서운 곳이 많기 때문이다. GOP에서 20개월 정도를 살았던 덕분에 그런 느낌은 좀 덜하지만, 일탈하는 행위 자체는 늘 새롭다.
서울 시내에도 이런 곳이 생겨 얼마 전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경복궁 옆 송현동 부지가 그렇다. 지난 10월 7일 오후부터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필자도 8일 저녁에 이곳을 방문했다.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서울공예박물관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송현동 부지의 공식 명칭은 '열린 녹지 광장'이다. 광장 초입에는 이곳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산은행 사택으로 쓰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소유로, 미군과 미국 대사관 직원의 숙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후 1998년부터는 삼성생명과 대한항공이 이 땅을 차례대로 소유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서울시가 이 땅을 매입해서 공원으로 개방했다. 이후에는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세운다고 한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다.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때 이 땅을 매입했다. 박 전 시장은 원래 역사문화공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 연구 발주까지 넣었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모 연구원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연구원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콘텐츠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역사문화공원 조성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처럼 녹지로 개방되었다.
그런데 돌아다녀보니 오히려 개방감 있는 녹지가 더 반가웠다. 말 그대로 '해방'이었다. 뻥 뚫려있어서 좋았다. 도심 한 가운데 녹지가 있어 반가웠고, 그 한가운데에서 주변 공간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특히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노란빛 밝은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건물로 막혀서 안 보이는 자연을 평지에서도 볼 수 있다니.. 종로구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장소가 아닐까.
공원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골목으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따라 이어진 골목을 통과하면 봄에 벚꽃으로 유명한 정독도서관 앞까지 이어진다. 정독도서관을 정면으로 좌측으로 내려가면 줄을 몇 시간씩 서있는 황생가 칼국수 앞을 지나 삼거리와 만난다. 정면에는 경복궁 담장이 보인다.
삼거리 좌측에 계란빵과 미니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다. 계란빵 하나가 2천 원이라는 점에 새삼 놀란다. 그래도 이 날 저녁이 쌀쌀해서 뜨끈할 때 하나 사봤다. 한 입 베어물자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싼다. 계란빵을 누가 만들었는지.. 참 요물이다. 차가운 밤공기에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다시 그 삼거리로 돌아가 경복궁 담장을 왼쪽으로 껴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 길은 예전에 정말 아무나 갈 수 없었다. 청와대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휑하다. 가방 검사를 하는 경찰도 없어졌고, 청와대 춘추관 앞에 있는 경비 시설에 경비단도 안 보인다.
춘추관 앞에서 경복궁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계속 돌아본다. 인적이 없다. 불도 다 꺼졌다. 대한민국의 24시간, 365일을 책임지던 청와대는 어디 갔나. 이제는 암흑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청와대를 밝히는 주황색 불빛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청와대를 감싸고 있는 북악산마저 작아보인다. 묘하다. 앞서 방문한 송현동 부지보다 더 마음이 이상하다. 대통령의 상징인 청와대는 이제 없고, 200m 떨어진 곳에 백악관만 남았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두 곳을 방문하면서 허무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별거 없네.’ 송현동 부지는 말 그대로 별 거 없었다. 그게 이 공원만이 가진 매력이었다. 아무 것도 없어서 주변이 빛날 수 있었다. 반면 청와대는 뭐가 많은데도 별 거 없었다. 아무리 호화롭고 아름다운 공간도 사람이 없으면 빛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종로구 삼청동 일대의 ‘별 거 없음’은 별 걸 다 만들어내고 싶은 필자에게 가르침을 준다. 허영 넘치는 청와대보다는 욕심 없는 송현동 광장 같은 삶이 더 가치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