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파업하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조선일보> 기자와 질의응답을 주고받던 원산노동연합회 위원장 김경식 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긴장감이 묻어나 조금 떨리지만, 단호한 울림이었다.
‘일당 10전 인상.’ 석유회사 라이징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한 만큼 임금을 올려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사는 임금 인상 조건으로 근무 시간 연장을 제안했다. ‘조삼모사’식 태도에 뿔이 난 노동자들은 단체행동에 나섰다. 1929년 원산총파업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김 씨를 인터뷰한 <조선일보>는 “신뢰를 잃은 사측이 고집을 피우다가 닥친 시련”이니 “책임을 면치 않을 수 없다”고 파업 배경을 분석했다. 파업하는 노동자 편에서 회사를 비판한 것이다.
해방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1953년, 국회가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을 공포하자 "노동자들을 불리한 노동 조건 아래에서 보호하고, 그들의 복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됐다"며 환영했다.
분위기는 민주화 이후 달라졌다. 갑자기 불어 닥친 세계화 바람에 는 뒤집어진 시각으로 노동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 논설위원은 사설에서 “노동조합 때문에 외국 기업이 한국을 떠난다”며 “일 안 하는 일부 노동귀족이 빈둥거리며 회사를 후려칠 궁리만 짜낸다”고 비난했다. 파업하는 노동자는 억압받는 시민이 아닌 회사를 망치는 불순분자가 됐다. 이때 등장한 ‘노조 악마화’ 프레임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더 굳어졌다.
얼마 전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자, 보수언론은 반대 기사를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불법파업에도 면책권’<한국경제> ‘反기업정책에 태평양 건너는 기업들’<조선일보> ‘유럽상의 “한국 철수” 공개 경고’<채널A> 이들 눈으로 본 대한민국은 노조 때문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특히 보수언론이 외국 기업 철수를 경고하며 근거로 제시한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ECCK) 성명서에 주목한다. 지난달 는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유럽상의에 ‘철수’를 강조해달라는 식으로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유럽상의는 주요 회원인 김앤장법률사무소 눈치를 보지 않았을까? 실제로 몇년 전까지 김앤장 소속 변호사가 이사진에 이름을 올렸고, 김앤장 수석고문 요한 반드롬은 현재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보수언론이 ‘기업 대변인’을 자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기업은 적자보다 불확실성을 더 싫어한다. 단체행동에 나선 노동자가 거슬릴 수도 있다. 언론도 적절한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지만, 노동자를 혐오 대상으로 몰아붙일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합리적 비판이 아닌 집단 따돌림에 가깝다.
정작 불확실성을 온몸으로 견디는 대상은 기업이 아닌 노동자다. 일자리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정리해고’ ‘희망퇴직’ ‘노동시장 유연화’ 등 언론과 기업은 보기 좋은 말로 포장한 뒤, 노동자에게 불안정성 폭탄을 떠넘긴다. 구조적 폭력이다.
노동을 우리말로 풀면 '힘든 일'이다. 단어 속에 ‘고통’이 숨어있다. 노동자는 힘든 일을 감수하는 사람이지, 힘든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힘을 모아 노동자가 받는 고통을 덜어야 하는 이유다.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노동조건 개선 없이 인민의 조건이 개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자 권리 개선에 힘쓰면서 노동자를 포용하고, 보수당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보수언론이 진정한 ‘보수’를 지향하려면, 다시 100년 전처럼 노동자 편에 서야 한다. 노동자를 적으로 만들고, 기업과 노동자 갈등을 부추기면, 사회는 더 불안정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