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aum im Wi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폐관수련인 Nov 22. 2022

1000일

약 8000km 떨어진 곳으로부터 1000일째

독일에 온 지 1000일이 지났다. 시간이 정말 너무 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석사 때는 박사과정 형들만 보면 정말 시간 안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정신없고 어리숙한 상태에서 시간만 소비한 것 같다.


17살 때부터 과학자 타이틀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목적을 직업 이름에만 가져다 두니까 미래성이 흐려지는 것 같다.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무슨 일을 하느냐에 더 초점 맞춰야 한다. 학자가 된다는 건 좋은데 학위 취득 이후의 성과가 관건이다.


거기서부터는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이 별의 개수처럼 많은 박사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성과의 압박들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학위를 취득할 수는 있다. 꾸역꾸역 월급 받으면서 목숨 줄인 연명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이런 놈이 박사냐는 소리를 듣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 소리가 곧, 그동안 나 하나 공부 시킨다며 힘쓴 가족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

차마 다짐하며 내뱉어댄 나에게 철판 깔고 뻔뻔해질 수 없다. 기왕이면 중간 정도 수준이라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도, 3명 안에 들더라도 꼴찌보단 낫다.


이런 건 자존심 때문인 것 같다.

그게 되겠냐, 너는 안된다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왔다. 그런 말들을 들어올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되게 했다.


처음 낯설었던 상황들도 결국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익숙하게 만들었다. 할 줄 아는 게 반복이고 체력 소모이기 때문이다. 참 무식하지만, 사람은 다들 사건 사고에 적응하며 발전하는 생물이라는 논리로 다가간 것 같다.


내 성과, 목적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한 번은 이성관계 때문에 골머리 썩인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짐승 다루듯 해결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불도저마냥 옷 벗고 달려드는 상황에서도 이성의 끈을 잡을 수 있냐 마느냐가 먼저 가 아니라, 뭔데 멋대로 내 영역에 들어오려고 하느냐가 첫째였다.


내 공부를 방해하려는 게 괘씸해서 패주고 싶다기보다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마인드같이 그런 본성도 컨트롤하는 나를 보고 싶은 거다.


내가 스스로에게 내뱉은 말을 끝까지 지키고 싶을 뿐인데, 더욱이 먼 이국에서 연애 드라마나 찍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도 한심해 보인다. 그렇다. 이곳에 온 목적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이 예술인들이 빗발치는 곰들의 도시에서도 사람 관계가 아직까지 나에게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게 느껴졌지만 덕분에 그저 담쌓고 연구에 집중하게도 만들어줬다.


결국 어디를 가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는 거다. 이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