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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Nov 13. 2021

한 태영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엄마가 개명을 했다. 70년을 부모님이 지어준 "말영"으로 사시다가 스스로 "태영"으로 바꾸셨다. 


엄마는 1952년도에 경주 시내에서 30분쯤 들어가면 "박실"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1남 5녀 중에서 5번째로 태어나셨다. 그 시절 다들 비슷한 처지였겠지만 아주 가난하였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엄마가 국민학교 다니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큰 이모와 외삼촌이 소년, 소녀 가장이 되었고 어릴 적부터 부모의 사랑도 모르고 자라셨다. 


그나마 엄마는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소사 아저씨가 불쌍히 여겨 "너는 우리 딸이다"하면서 따뜻하게 챙겨주신 것을 기억한다. 또 한창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이어서 학교 끝나면 조금 한 어린애가 공사장에서 흙 나르고 포대 자루 날랐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는 꿈도 못 꿨지만 엄마는 자매들 중 유일하게 핸드볼부에서 운동을 해서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가 엄마의 찬란했던 순간이 시작된다. 전국체전에 경북대표로 출전해서 육영수 여사에게 받은 동메달을 보물로 여기고 경북의 스타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퍼레이드 하던 날, 운동장을 메운 함성의 소리를 맘에 깊이 세기셨다. 지금도 핸드볼 같이 했던 친구들과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만나신다.  


20대에는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일도 하고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중매로 빨리 결혼을 했다. 양가 부모도 살아계시고 착한 아들이었던 아빠를 만나서 75년에 누나 낳고, 77년에 나를 낳고, 79년엔 동생을 낳으셨다. 시집살이는 부모 없는 서러움과 천정의 든든한 힘이 없다는 것을 아빠랑 부부싸움을 하고 난 후 자주 푸념을 하셨다. 


5 가족이 농사를 짓던 양산 주남마을에서 출가하여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전하동에 자리를 잡고 쌀장사 그리고 떡방앗간을 시작하셨다. 워낙 건강하고 성실한 분이어서 장사는 잘 되었다. 아직도 명절에 우리 집에 오기 위해 동네 입구까지 줄이 늘어져있던 게 기억나고, 다른 집에 차가 없을 때 우리 집엔 엑셀 차가 있었다. 근데 중공업 노동자들이 주 상대여서 중공업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받으러 밤늦게 아빠랑 오토바이 타고 찬바람을 뚫고 다니셨다. 지금도 겨울이면 손등이 뜨는 엄마 손을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우리 학창 시절이 엄마의 두 번째 찬란한 시절이다. 우리 삼 남매는 엄마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학업성적도 우수하였고 말도 잘 듣고 반장도 잘하는 타의 모범이 되는 아이들이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우리 방앗간에 모여 자녀교육에 대한 비법을 귀담아듣고 엄마는 항상 뿌듯해하셨다. 게다가 엄마 머리맡에 항상 신문, 천자문과 국어사전을 두고 스스로 공부하고 1시간 버스를 타고 울산대학교 주부대학도 수료하셨다. 여자가 똑똑하면 안 된다는 할머니와 아빠의 눈총도 뒤로하고 풀을 먹여 빳빳이 세운 모시옷 차려입고 이쁘게 화장하고 나가시던 까만 머리의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후로는 엄마에게 좋은 일들이 그리 많이 생기지 않았다. 성인이 된 자녀들은 엄마의 원대로 평범하게 살지를 못했고 아빠의 가정폭력은 계속되었고 동생의 병력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제 동생만 건강하면 될 것 같았는데 바람대로 되지 않고 이제는 엄마가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많이 늙으셨다. 


70년의 삶의 무게를 이고 지고 살던 말영는 기억 속으로 사려졌다. 여전히 엄마는 다시 한번 찬란한 삶을 꿈꾸고 태영으로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 코로나로 아버지 장례식도 못 갔지만 또 엄마의 환갑도 따로 챙겨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년 봄에 엄마한테 유럽 크루즈 여행 가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가고 싶다고 하신다. 멀어서 힘들어서 싫다고 하실 줄 싫다 하실 줄 알았는데 너무 가고 싶다니 놀라웠다. 아들이 관광가이드인데 엄마 가고 싶다는 유럽 여행도 못 모시면서 누굴 가이드하겠나 싶어서 꼭 내년에 엄마랑 꼭 유럽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앞길을 커져서 순탄해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맘을 담은 이름, 한태영 이란 이름의 여권과 비행기 표를 들고 유럽의 공기도 느끼고 지중해의 크루즈도 탈 것이다. 다시 한번 찬란한 시간이 오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한태영 씨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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