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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CHOI Apr 13. 2024

하안 주공 아파트 :  고통을 줄게

사진 에세이




초등학교 2학년에서 4학년 때까지 하안동 주공아파트 7단지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이 시기에 사업을 하셨는데, 초반에 잘 경영하시다가 부도가 났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갔더니 아파트 복도에서부터 건장한 남자들 10명 정도가 넘게 서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역시나 단순한 초등학생 아니랄까 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니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혼자 거실에서 주저앉아 울고 계셨고, 집 안 모든 집기엔 '빨간딱지'가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집 안에도 건장한 남자들이 10명 정도 있었다. 그중에 어떤 남자가 나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던 기억이 있다. 난 그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당시엔 그것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초등학생이라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 자체를 당시엔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우시면서 지훈이네 집으로 가 있으라고 하셨다. 나의 영혼의 단짝 '김지훈'.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던 지훈이네 집은 교회였다. 평소 자주 가서 놀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지훈이네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지훈이와 게임을 했고, 거기서 하루를 보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지훈이 집으로 간 이후로 바로 그 건장한 남자들이 우리 집 물건을 밖으로 뺐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로 가자고 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여기서 잠깐 살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거기서 아버지와 엄마 나, 세 식구는 그 집에 얹혀살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 하나를 빌려준 그분은 말도 안 되게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이었다. 아버지가 알고 계셨던 거래처 사장님이셨다. 그분의 집은 어림잡아 25평 정도 되는 빌라였는데, 방은 세 개, 화장실은 하나였다. 그 집에 우리 집 식구까지 총 10명이 살았다. 10명 말이다. 열 명. 


그 사장님의 자녀는 딸 넷, 아들 하나였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가족을 받아준 그분이나 들어간 우리 가족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엄마는 아빠와 엄마 둘 중에 같이 살아야 하면 누구랑 살겠느냐고 질문하셨다. 난 5초 정도 고민하고 "아빠"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무표정으로 알겠다고 하셨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했을까? 하지만 난 명확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주부셨고, 아버지는 경제 활동을 하시는 분이기에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것을 말이다.


부모님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어린이 주제에 이런 영악한 결정을 내린 것은 생존본능에서였을까? 이때부터 난 어쩌면 형편없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안 주공 7단지에서 살던 시기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최악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오락실 가기 바빴다. 아울러 건전하지 않은 애들이랑 어울리기도 하여 물건도 훔치고 문제아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당시 신경쇠약으로 인해 나에게 매일 화풀이하셨었었는데, 학교 끝나면 집으로 너무 들어가기 싫은 나머지 돈이 없어도 매일 오락실 가서 시간을 보내거나 지훈이네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늦게 집에 들어오면 엄마의 잔소리와 짜증이 이어졌다. 경매로 집이 넘어가서 쫓겨날 때까지 1년 정도를 이렇게 보냈던 것 같다.










20년 정도 지나서 다시 하안동 주공아파트를 찾았다. 좋지 않은 기억이 깃들여져 있는 그 집 말이다. 당시엔 아파트 복도며 엘리베이터 타는 공간, 계단이 크고 거대해 보였는데 너무 좁고 초라한 그런 아파트로 보였다. 하안 주공아파트를 가보기로 결정한 후 다시 살던 아파트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감정이 들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저 한낱 추억에 불과한 과거일 뿐이었다. 하지만 감사한 과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부모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제일 중요했던 건 부모님은 당시 정말 이혼을 하려고 하셨던 것이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나에게 아빠, 엄마 둘 중 누구와 살겠냐고 물어보셨던 것이었다. 그때 나의 대답으로 인해 어머니가 상처받았단 사실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가정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내가 우리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분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집도 없이 남의 집에 잠시 얹혀살았던 가정이 이렇게까지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통에 대한 경험이 우리 가정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것이었을까, 아님 인생에 대한 절박함이 우리 가정을 기적으로 이끈 것일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정을 포기하지 않은 우리 부모님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이 시기에 우리 가족은 무언가 미약한 빛에 반응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아직도 티격대격 하신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을 마치시고 들어오셔야 할 시간에 안 들어오시면 걱정이 돼서 전화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시장을 다녀오거나 친구를 만나고 집에 늦게 들어오시는 날엔 아버지가 걱정을 하신다. 비록 표현력이 없으시고 무뚝뚝한 아버지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20년 만에 찾아간 아파트를 둘러보는 내내 엷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지금까지 하안동 주공아파트는 고통의 장소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큰 행복으로 가기 위한 장소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충분히 세상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겪었던 우리 부모님, 회피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정면으로 직면하시고 그것을 견뎌내 온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나 또한 그런 부모가 될 것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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