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r CHOI Apr 06. 2024

울산 : 남은 자들을 위한 위로

사진 에세이

어제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은 울산이었다. 지도를 보니 굉장히 먼 곳이었다. 대한민국 거의 땅끝이나 마찬가지였던 울산대학병원, 쉽지 않은 거리긴 했지만 아픔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른 거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가야겠다 생각했다. 


조문에 있어서 먼 거리를 온 사람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라든가, 고마움의 표현이라든가, 얼마나 고생해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자에게 감히 이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었다는 것은 고인에 대한 추모를 하겠단 마음보단 아마 다른 마음이 있어서 일 것이다. 차라리 가지 않는 게 좋다. 


기쁨보단 슬픔의 힘이 더 크다고 믿는다. 즐거움보단 고통의 색이 더 짙고 명확하다. 아픈 자들을 위한 위로는 어떠한 힘으로도 그 아픔을 쉽게 누그러트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옆에 있어주는 것에 힘을 써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기뻐하는 자리와 위로의 자리 둘 중에 위로의 자리로 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위로의 자리란 의미는 결국, 아픔 또는 고통 내지 슬픔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에 그렇다.







친구는 남자치곤 돌아가신 아버지와 흔치 않은 부자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퇴근하고 아버지와 꼭 매일 통화를 한다든가,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힐링한다고 말하는 등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다. 웬만하면 이런 부자관계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각별했던 친구였다. 


그러한 아버지를 떠나보낸 그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슬플지 난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빈소 앞에서 조문을 하고 친구 가족 분에게 조의를 표하는데 다들 우시면서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상실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는 눈은 마주하기 어렵다. 각별하고 애틋한 사람이 떠나간 빈자리에서 마주한 사람의 눈이라면 더욱 힘들다. 


가족분들에게 진심으로 충분히 위로를 전달하지 못한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죽음이란 반드시 인간에게 약속되어 있는 미래다.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 죽음을 초연하게 바라볼 있는 자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자유로울 없으며, 죽음이란 것이 다가올 그것을 겪는 당사자나 그것을 바라보는 자나 크고 작은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아직 난 겪어보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감히 상상도 생각도 하기 싫다. 하지만, 만남과 이별은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약속이다. 누구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별을 준비한다거나 슬픔을 대비할 순 없을 것이다. 온몸으로 온전히 슬픔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거기서 우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이가 살아 있는 동안 그와 함께 좋은 것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이라도, 당장이라도, 일상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조금 진심을 다해 깊이를 다해 대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든지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으면 펑펑 울라고 말이다. 


그렇게 난 다시 서울로 왔다.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다녀오느라 수고했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작가의 이전글 경복궁 : 첫사랑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