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가치 1 ( 사진 강만보)
1966년 봄의 끝 무렵. 여덟 살 나는 동네 언니들과 제주시 앞바당*으로 갔다. 탑동은 수심이 낮은 바당이었다. 이 말인즉슨 나 같은 얼치기도 썰물 때 성큼 들어가 보말(고둥)이나 성게. 소라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팔을 한껏 걷어 올려도 소매가 젖었다. 편물로 짠 봄 스웨터를 벗어 바위에 걸쳐두고 넌닝구(러닝셔츠) 바람으로 바릇잡기에 몰두하였다. 굵은 고둥이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정신이 없었다. 이걸 어머니께 빨리 보여드리고 싶은 조급함과 견물생심이 겹쳐 저녁놀이 내리는것도 몰랐다. 양은 주전자가 묵직해졌을 때 뒤를 돌아보니 내 스웨터가 보이질 않았다. 그동안 밀물이 바위를 가뭇없이 삼켜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화난 얼굴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확 끼쳐 망망한 바다를 향해 목이 쉬게 울었다. 민적 거리며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이상하게 매를 들지 않았다.
- 너에게 잡히는 눈먼 구쟁기(소라)도 이섰구나(있구나)
탑동해안은 제주시내의 가장 중심가에 있는 해안으로서 햇빛이 비추면 조그맣고 까만 ‘먹돌’(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급격히 냉각되면서 만들어진 급랭 현무암)이 반짝반짝 빛을 내던 곳이었다. 제주도가 형성될 때 뜨거운 용암이 분출되어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검게 굳으면서 만들어진 해안지역은 화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탑동해안도 마찬가지였다.썰물이 되면 주민들이 몰려나와 빛나는 먹돌과 함께 저녁거리를 위한 바릇잡이(게, 고둥 등을 잡는 일)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뤘다. (제주관광신문 진순현 기자의 글에서 )
탑동, 1985년(강만보 사진)
이렇듯 탑동 먹돌 밭은 자자분한 반찬거리를 제공해주는 바다밭이었다. 나 같은 서툰 바치도 몇 시간 허리를 굽히면 먹보발을 한 대접은 수확할 수 있는 곳, 방파제에 걸터앉아 메들리로 동요를 부르며 이십 대의 불안을 달랬던 그곳이 어느 해부터 재취는 금지하고 그냥 바라만 보는 바다로 변했다.
궁핍하고 외로웠던 이십 대, 어느 날은 절박하게 죽고 싶다는 심정으로 야심한 밤에 탑동 바다를 향했다. 남문통 우리 집에서 걸어 10분이면 당도하는 곳, 탑동바다는 암흑 속에서 괴물처럼 허연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거친 파도와 마주하며 어서 나를 데려가던지 알아서 하라고 대들었다. 밤바다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고, 가늠할 수 없는 내 미래만큼이나 막막했더랬다.
새벽 어스름에 검은 고무로 이엉을 맨 집들이 눈에 들어올 때쯤 나는 현실로 복귀하여 귀가했다. 집안으로 들어설 때 퇴락한 마루에 까무룩이 잦아드는 촛불처럼 망연히 서 계시던 어머니. 당신은 포말로 축축해진 내 몸을 어루만지며 " 나에게도 못할 고민이 뭐 이시냐?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냐?"라고 눈물을 떨구셨다. 그날의 탑동 바다와 어머니는 하나였다.
매립되는 탑동(탐사협 사진)
1991년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 만들어진 이후, 개발의 신호탄은 탑동 매립이었다. 내게 삶의 준엄함을 가르쳐주던 바당이 매립된다고 했을 때, 난 임신한 몸으로 탑동매립 반대 운동에 참가했다. 바다는, 저 탑동 바당은 우리 모두의 바다가 되어야 했으므로.
자본의 힘 앞에 굴복한 탑동 바다에 건물들이 들어섰을 때 나는 그 반대운동을 배 속에서 함께 한 딸아이와 그곳을 관광객 되어 걸었다. 대형건물과 오락시설이 빼곡히 들어찬 탑동은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갔을까. 탑동매립이 우리 모녀에게 준 것은 어설픈 바이킹 놀이기구와 제주 최초의 이마트였다.
1998년 여름. 바닷바람을 기대하고 간 탑동은 콘크리트 바닥의 더운 김이, 후덥지근한 에어컨 열기가 바다 위로까지 물컥물컥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제주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