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자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는 우리나라 풍광을 유럽에 알린 최초의 서양화가다. 그녀는 1915년부터 20여 년간 동북아시아를 두루 여행하며 각 나라의 풍광과 생활풍습, 인물들을 남겼는데, 1919년 3월 28일 여동생과 한국에 왔다. 아직 3.1운동의 여파가 한창일 때였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1살부터 런던에서 자랐다. 화가로서 천부적 소질을 갖고 태어났으나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참 다행인 것이, 어떤 유행이나 사조를 타지 않은 그녀 만의 감각과 눈으로 망한 나라 (일단 주권을 빼앗겼으므로)조선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풍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1919년~ 1924년 돌아갈 때까지 서울, 평양, 원산 등지의 여러 모습들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렸다.
“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2006, 책과함께)"는 언니 엘리자베스가 그림을, 동생 엘스펫은 글을 써 남긴 기록이이다, 이 책은 영국 허치슨 출판사에서 나온 "old korea"(1946) 를 재미학자 송영달이 완역했다. 사실주의에 충실하여 수채화, 에칭, 목판화로 다양하게 표현된 작품과 직접 쓴 그림 설명은 풍속사, 복식사, 공예사 등의 사료로도 가치가 크다. 화가의 눈에 비친 조선은 격조 높은 나라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망인>이라는 그림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미망인>, 1919
"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당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3.1 운동에 적극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뻣뻣한 삼베였다. 북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책과함께. 2006) 중에서
왼쪽 뺨과 목엔 고문의 흔적이 선명하다. 이 여인의 기품은 양반의 도도함이나 권위의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정신적 기품을 해방 후 우리 대한민국은 이어왔을까. 촛불시위 때 적폐 청산이라는 말을 목이 쉬도록 외친 이유가 이 여인의 모습 속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여성들의 3.1만세운동 참여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여학생이나 부인들은 물론 경남 통영군의 이소선(李小先)․정막래(丁莫來) 등 기생들이 1919년 4월 2일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해 만세운동을 선동한 죄로 1919년 4월 18일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는 공판기록도 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 들어 올려졌다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한국의 가정 내에서 여자들은 하대를 당하지만, 3.1 만세운동 때에는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 싸웠다. 한국 여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 가를 보여주었다" (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중에서)
이 작품은 모스크바 제 6회 '세계청년축제'(1957)에 출품한 월북화가 이쾌대의 그림이다. 그동안 독립기념관 등에서 내가 본 1919년 3.1 운동을 표현한 부조, 그림 등은 고전적 이미지가 강했다. 2018년,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 <평양책방>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제주의 1947년 3.1운동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비폭력 무저항의 기미년 3.1 운동이 내가 본 대부분의 역사화처럼 가만히 서서 만세삼창을 한 게 아니라, 조신민중은 저런 동적 에너지로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만세운동의 기세에 말도 놀라고 사람도 말처럼 뛰고 있다. 나라 뺏긴 지 10년 째인데도 우리 정신은 빼앗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쾌한 장면이다. 이 운동에 고무되어 중국 5.4운동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며 브루주아 민족운동으로 폄하된 3.1만세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엘스팻은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는 한국인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 죄수들은 짚으로 된 삐죽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었지만 덩치가 왜소했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동양의 신비를 찾아 그녀가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일본이었다. 우키요에(에도시대에 유행한 일본의 다색 목판화) 아름다움에 매료돼 많은 작품을 일본풍 판화로 제작했다.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인인 그녀에게 한국은 미개한 식민국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방문한 한국에서 그는 한국인의 고결함과 강인함을 발견한다. 더불어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마저 바뀌게 된다.
"절도 있고 엄하고 부지런하며 싹싹한 일본이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구는 일본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 ("코리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