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각 오픈 소식을 전하러 남해각 마지막 사진사 박용길 님에게 갔다. 한 때 19명까지 있었던 남해각 상주 사진사는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의 보급으로 점점 줄어갔다. 결정적으로 창선 삼천포대교의 개통으로 남해대교를 찾는 사람도 급격히 줄었다. 그곳에서 최후의 사진사를 했던 박용길 님은 남해대교 곁을 떠나지 않고 사모님과 대교 아래에 건어물 가게를 하며 산다. 남해대교와 남해각에 얽힌 이야기 자원을 모은 책을 전달해 드리러 가자 또 다른 이야기 자원이 펑펑펑 쏟아져 나온다.
남해대교 사진센타 영수증 뭉치와 장부 여러 권을 보여주고 기증해 주셨다. 남해대교 방문객들 사진을 찍고 장부에 손님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고 저녁에 인화하여 다음 날 노량 우체국에서 발송했다고 한다. 반송된 사진과 필름까지 보관하고 계셨다. 모처럼 놀러온 분들이 술에 취해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았고 엉뚱한 주소를 가끔씩 적어놓아서 반송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왜 이걸 보관하고 계시냐고 물으니,
"나이를 더 먹으면 이거 한 번씩 들춰 보며 옛날 일 생각하려고 했지."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의외의 물건을 또 꺼내 놓는다.
남해각에는 말이 있었다. 제주에서 가져왔는데 남해각 사진사들이 영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 돈을 조금씩 나누어 공동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다 사진사 분들이 한 두 명씩 그만두고 말은 박용길 사진사가 온전히 관리하며 키웠다고 한다. 사진사님은 노량마을에서 남해각으로 출근할 때 타고 가고 퇴근할 때도 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마치 지금 말에 타고 있는 듯이 얼굴에 자신감이 번지고 눈빛이 강해진다. 옆에서 사모님이 혼잣말로 추임새를 넣는다.
"자가용은 놔두면 돈이 안 드는데 말은 날씨가 안 좋아 가만히 놔둬도 연료비가 나가더라."
말은 덩치가 크지만 민감한 동물이라 관리가 까다로웠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말발굽을 깎아주고 편자를 교체해줘야 하는데 그 닳은 편자를 보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운동도 부족해 말들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루는 손님이 많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말도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잠깐 짬이 나서 여물 주는 곳으로 데리고 와서 밥을 먹는데 또 손님이 와서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데 말이 여물 주는 곳으로 가더니 여물통에 손님을 빠뜨려 버렸다고 한다. 노량 약국에 청심환을 사러 가는데 너무 놀래서 발이 안 떨어졌다고 한다. 마지막에 키웠던 말을 기억하는데 그 말은 사진사님을 졸졸졸 따랐다녀 눈에 안 보이면 찾아서 집도 오래 못 비웠다고 한다. 사진사님 발소리만 들어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처럼 남해대교와 남해각에 얽힌 이야기 자원은 지속적으로 쏟아져 공간 재생을 위한 창작자들의 해석 작업은 풍부해지고 있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또 유자청 2병을 챙겨서 차에 넣어주신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작업을 하는 것인데 남해대교와 관련된 인터뷰를 하면 귀중한 자료에 재밌는 이야기에다가 맛있는 차와 선물까지 내어준다. 남해대교가 남해 사람들에게 '고마운 다리' 였듯이 그 기억을 이어 재생하여 어려운 시기 그들에게 선물 같은 '고마운 다리'로 만들어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