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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용 Apr 17. 2021

기념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

남해각

최승용, 김현숙(남해각 운영자)


남해각 최후의 민간운영자 김현숙 님을 만났다.

1987년 남해각의 1층 한 켠 토산품점을 운영하기 위해 김현숙 님 부부는 여수에서 남해로 왔다. 그 당시 전세 3,000만 원에 들어왔다고 하니 남해각의 상업적 가치를 가늠케 해준다. 남해대교 이미지가 들어간 수건, 책받침, 배지, 소라껍데기, 목걸이, 팔찌, 필름 등 남해와 남해대교 방문을 기념할 수 있는 토산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그 당시 수건이 귀해 선물용으로 좋아 남해를 떠나기 전 꼭 들려서 기념으로 다들 남해대교가 그려진 수건 한 장씩은 사갔다고 한다. 그때의 기능이 지하층은 막 나이트클럽이 망했었고 이후 노래방이 되었고, 1층은 식당과 토산품과 건어물점, 2층은 여관, 옥상은 전망 기능과 함께 천막 지붕이 쳐져 있어서 소풍이나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고 한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시절이었지만 식당도 가볍게 점심으로 비빔밥이 잘 팔려 근처 덕신마을 어머님 중에 남해각 식당일 안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999년 IMF 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각의 주인은 경영이 어려워졌고 김현숙 님 부부가 매입하여 남해각 전체 운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IMF가 터졌는데 왜 이렇게 큰 사업체를 인수했냐고 묻자


"대교가 귀하니깐."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03년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었다. 그때부터 남해대교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남해각 방문객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하는데 신혼여행, 수학여행으로 남해각에서 머물렀던 사람들이 그때를 추억하러 많이 왔다고 한다. 기념을 기념하는 공간인 것이다. 1975년도에 남해각이 개관했으니 25년이 흘러 그곳을 방문했던 아이는 청년이 되었을 테고 청년은 장년이 장년은 노년이 되어 남해각을 다시 찾은 것이다. 남해각은 2019년 1월까지 운영되었으니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45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업종, 같은 이름으로 운영하는 상업공간이 얼마나 될까. 2000년대 다시 찾은 여행객들은 남해각에 짐 풀어놓고 대교 한 번 왔다 갔다 걷고, 금산 보리암 들어갔다가 돌아와 하루 묵고 떠났다고 한다. 점점 쇠퇴하기 했어도 30년을 남해각이라는 대공간을 잘 운영할 수 있었던 노하우를 묻자


"여기는 전망이 좋으니깐 음식 간 잘 맞추고, 친절히 하고, 깨끗한 이불 깔아주고."


남해각 주차장 씬

남해각 재생 설계를 한 내추럴시퀀스팀은 전망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을 씬을 횡적으로 종적으로 여러 곳에 마련해 놨다. 트리탑 웨이-> 남해각 주차장-> 남해각 옥상-> 야외음악당-> 운영 사무실 옥상. 동선에 따라 시퀀스를 가지며 노량해협과 남해대교의 여러 씬들을 보여준다.

남해각 마스터플랜, 내추럴 시퀀스


이불 이야기가 나와서 김현숙 님에게 남해각에서 수집한 이불로 <호텔 남해각>이라는 작품을 만든 최정화 작가님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확대해 찬찬히 보시더니,

최정화, <호텔 남해각>, 경남도립미술관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해준 이불이에요. 여기서 우리 아들이 나왔죠."


여관 운영자 숙소에서 보관하다가 이제는 쓸 일이 없다 싶어 그냥 놔두고 왔다고 한다. <호텔 남해각> 작품은 경남도립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남해각에 전시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김현숙 님은 또다시 방문하여 '기념'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김현숙 님 부부는 여수에서 대리점 도매상을 하다가 풍광 좋은 곳에서 쉬어가며 일해볼까 하며 온 것이 33년을 남해각에서 보냈다. 남해섬이 귀해서-대교가 귀해서 정착하게 되었고 귀한 섬과 대교를 기념하기 위해 찾아왔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른 후 기념을 기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기념'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과 작품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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