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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용 Sep 07. 2019

남해대교는 우리를 기억한다

남해각 프로젝트

1973. 남해대교 개통식

남해와 서울을 버스로 오가던 시절. 남부터미널에서 남해 가는 버스를 타면 남해 사람들이 그득했다.
서울의 큰 병원에 다니러 온 어르신들, 고향집을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버스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뭔가 긴장한 표정이 흘렀다.

그렇게 4시간을 달려 진교를 지나 남해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노량해협이 슬쩍슬쩍 보였다. 그때부터 버스 안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다 남해대교가 다이내믹하게 펼쳐질 때는 얼굴이 환해지며 모두들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나 대교다.”


드디어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 남해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일 것이다. 사람들은 얼른 내려 집에 가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이며 짐을 챙겼다. 설천과 고현을 지나 대교에서 남해읍까지 가는 그 20분은 서울에서 남해대교까지 왔던 4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터미널에 도착하면 마중 나온 부모 자식들이 짐을 건네받아 포터 트럭 짐칸에 올리고 함께 앞 좌석에 올라타 집으로 출발했다.


1973년 남해대교가 놓이며 남해섬은 새로 열렸고 남해대교는 남해섬의 관문으로 그 시작점이 되었다. 그 사이 창선-삼천포대교가 놓였고, 노량대교가 놓였다. 시대의 변화로 오래된 것은 낡기 마련이고 기능은 쇠퇴한다. 그러나 남해대교는 남해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 남해가 다시 열린 사건을 증명해주는 물적 증거물이다. 이야기는 각색되고 없어지지만 그 물적 증거물이 있다면 그것을 부정하거나 잊기는 힘들다. 우리의 기억을 되찾아 잇는 일. 남해섬 공동체의 기억을 회복하는 일이 이번 아카이브의 목적이다. 남해각 재생 프로젝트는 남해의 시작점 우리의 시작을 다시 찾는 일이다. 우리는 일상에 쫓겨 남해대교를 잊었을지 몰라도 남해대교는 우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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