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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용 May 31. 2020

울고 싶을 때도 오는 곳

송호경(1951년생), 미조 본촌마을 주민, 미조항, 2020.05.20

미조항 등대불이 켜질 때가 되면 동네 얄개들이 모여들었다. 등대불이 켜지는 시간에 맞춰 재빠르게 "경남 남해군 미조리 등대불이, 깜빡" 할 때 등대불이 탁 켜지는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다. 헤엄으로 등대 방파제부터 건너편 '미조도' 로 가서 밤을 주워오기도 했다. 아직도 미조에는 동네 얄개들이 많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도 많았다.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곳 사람들의 집단기억에 남아있는 '등대'는 경관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있기에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퍼즐을 맞춰나갔다.


"우리 어머니가 93세인데, 어머니 7-8살 때, 왜정시대 때인데 큰 태풍이 와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그것 때문에 방파제를 쌓고 등대를 만들었다고 들었네. 그 때 송정이나 초전이나 천하(마을) 방풍림을 정비 했다고 들었으니 얼쭈 그 쯤에 등대를 만들었을거네."


기상청 사이트에서 100년간 한국에 상륙한 태풍 정보를 살펴보니 87년 전 1933년에 큰 태풍이 왔었다. 송호경 어르신의 어머니가 7살 때이다. 과거 신문기사를 살펴보니 동아일보 1934년 7월6일자 "南海彌助港 防波堤計劃" 이 등장한다. 이 후 동아일보 1938년 1월 22일자 "躍進하는彌助港 防波堤를築造" 미조 등대는 1938년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미조항 등대는 예전에는 축전지로 지금은 태양광으로 불을 깜빡이며 그 기능을 이어오고 있다. 반면에 맞은편 '미조리 상록수림'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음에도 지금은 펜스로 둘러쳐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주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간다. 그곳 역시 마을의 남녀노소 겨울에도 푸른 상록수림을 지나다니곤 했고 한 여름에는 그늘이 좋아 더위를 시켰던 곳이다.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것이 오래된 것들의 가치와 이야기를 잇는 방법이다. '절집'은 현대인들도 향유하며 기억하지만 '서원'은 잊혀져 간다.


송호경님은 미조 간첩선 사건부터 미조도 호화별장 철거 사건까지 이야기 보따리가 술술술술 풀려나왔다. 말미에는 남해 관광에 대한 방향성을 밝혔는데, 

남해 보존지도-보호수 편, 송민선 그림


"남해도 지도를 보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다. 남해 관광도 엄마의 넉넉함으로 엄마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받아줘야 한다. 사람들에게 남해는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울고 싶을 때도 가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 


남해는 세상의 복잡함과 경쟁으로부터 한 발 비켜나 쉴 수 있는 곳이며 주변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도 경관을 보존하여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 보존은 향유를 전제로 한 보존이며 "이야기를 소비" 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변형하지 않으며 밀어내듯이 후세대로 전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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