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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Jul 11. 2019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추억

뉴질랜드의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Tongariro Alphine Crossing)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트래킹 코스 중 하나로 화산 지대를 횡단하는 고난도의 트래킹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 코스를 나는 두 번 횡단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다른 한 번은 (그때 근처 호스텔에서 자원봉사자를 했었는데) 함께 일하던 봉사자들과.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에서의 나


그중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횡단할 때 있었던, 내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횡단을 떠날 때 마치 관광지를 가듯 가볍게 생각해 맨투맨과 운동용 레깅스를 입고 출발했다. 친구들과 함께라 본격적이기보단 상당히 캐주얼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지대가 될수록 아주 추워질 뿐 아니라 산을 올라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하다 발을 헛디디면 실족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사고가 매년 발생한다.)


잠깐 바위틈에 쉬면서 너무 추워 친구들과 꼭 붙어 달달 떨던 기억이 난다. 외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험난하고 높은 산에 오르는 중인데, 체력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너무 온도가 낮은 데다가, 주위에 온통 안개가 껴서 가까운 시야도 확보가 안 됐다. 횡단을 끝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그만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안개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사진. 산 위쪽이 전부 구름으로 덮여있다.


이때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는 대학교에서 들었던 신화에 대한 수업에 대한 생각도 있었다. 수업에서 교수님이 "왜 신화 속 인물들은 꼭 죽기 전에 신발을 벗는지,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지 생각해보라"라고 했었는데 교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을,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몇 시간이고 걷다 보니 알 것 같았다. 험난한 자갈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신발은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였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결국 가장 오르기 힘들었던 산의 꼭대기에 도달했는데 안개가 심해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너무 추웠고,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었으므로 아주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Look! Alyse! (앨리스, 저기 봐!)" 친구들이 소리쳐서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 거대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바람에 구름이 잠시 걷힌 것이다.



이 순간 내가 느꼈던 기분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자연의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을 두 눈으로 보며,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곧 구름이 다시 시야를 가렸다. 내가 그 산봉우리를 본 것은 길어봤자 5분 남짓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 인생 전체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건 나에게 하나의 싸움이었고 보상이었다.


마침내 크로싱을 마쳤을 때는 무척 행복했다. 하지만 끝내고 나서의 행복감보다, 오히려 안개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몸과 마음 모두 좌절감에 휩싸여 있을 때에 한 줄기 바람에 갑자기 눈 앞에 보였던 그 산봉우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이때의 경험으로 앞으로 삶에서 경험하게 될 많은 무력감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지 체득할 수 있었다. 그건 '희망'이다.


만약 삶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런 종류의 순례길, 여정에 나서기를 꼭 권하고 싶다. 어쩌면 삶이 당신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놓치고 있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크로싱을 마친 나와 친구들. 아, 이때의 자유로운 기분이란!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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