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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Apr 07. 2019

명문대 문과생의 진로 선택지

다양성의 측면에서 너무 빈곤한



어제 과 차원에서의 커리어 밋업이 있었다. 행사의 제목은 (거창하게도) <글로벌/디지털/저성장 시대 인류학도의 '돈벌이'-쿨하게 먹고살기>였다. 과에서 나까지 총 4명이 커리어 발표를 했는데, 주제는 아래와 같았다. 나는 두 번째 순서였다.


B2B 기술 스타트업에서 글로벌 마케터란? _ B2B 마케터

회사에서 글 쓰며 먹고사는 법 _ 콘텐츠 에디터

착한 일 하면서 돈 벌기: 사회혁신 비즈니스와 공공성 _ 비영리조직 프로그램 매니저

IT 업계에서 여성 개발자로 커리어 쌓기 _ 웹 프런트엔드 엔지니어


나는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했다. 인류학은 학문으로는 무척 매력적이지만 기초 학문이기 때문에 졸업 후 진로 고민이 무척 많은 과다. 게다가 기존의 가치관을 해체하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사회에 나갈 때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자본주의의 구조와 폐헤에 대해 공부했는데, 이제는 그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사람이 되라고?' - 이제 와서 보면 조금 웃긴 고민이지만, 나 역시 졸업할 당시에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화인류학과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사회과학, 인문학을 배우는 많은 문과생이 비슷한 고민을 경험했으리라 믿는다. 대학에서 하는 공부와 취업이 동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명문대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교수들이 취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취업을 위한 수업이나 지원이 적기도 하다.


그래서 후배들을 위해 이런 커리어 밋업들 기획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내가 학부생 때 겪었던 혼란이나 어려움도 생각나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많이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강연을 준비한 동기, 선배, 후배들도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글로벌/디지털/저성장 시대의 직업


시작할 때 지도교수님은 서문으로 아래와 같은 말을 해주셨다.


"우리 교수들은 국민국가 시대에 제조업, 고성장 시대에 살았습니다. 최근의 글로벌, 디지털, 저성장 시대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에는 한계가 있어요. 일자리 문제는 동시대적인 지혜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자리는 정말 많이 변하고 있다. 나는 커리어를 HR 스타트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일자리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사회초년생부터 남들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평생직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직도 과거에 비해 무척 흔한 일이 되었다. 첫 번째 발표에서 "이제 직업은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며, 현대인은 삶에서 12-15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미래에는 더 많아지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처럼, 현대인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고,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직업도 무척 많아졌다. (특히 인공지능, 빅데이터 관련된 분야가 그렇다.) 나만해도 학부생 시절에는 기자나 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IT회사의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일하게 되었고, 지금은 브랜딩 에이전시에서 컨설턴트라는 직함으로 불리고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직장에서 어떤 직무를 갖게 될지 알 수 없다.


"직업은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COO


개인적으로 바로 이 점, 그러니까 '이직을 통하여 원하는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 자체가 커리어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짐작컨대 어제 발표를 함께 하게 된 네 명도 다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거나 현재 스타트업 씬에서 일하고 있고, 심지어 한 명은 개발자로 직무 전환까지 했다! 스타트업 씬에서는 이직을 하며 몸값을 올리는 게 이미 자연스러운 트렌드다. 그만큼 환경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늘 공부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그 과정조차 즐기는 사람이 많다. 늘 열정적인 동료가 있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메리트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vs 대기업, 그리고 안정성


하지만 어제 발표 이후 "계속해서 이직을 하려면 힘들 텐데, 안정적인 대기업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아직 한국 사회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경우가 많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생각은 행사 이후의 뒤풀이에서 학부생의 말을 듣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늘 행사가 목표로 했던 3-4학년 학생은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CPA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또 정말 많은 학생들이 고시 공부 중이라고 했다.


먼저 대기업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첫 커리어로서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것을 경험할 기회가 많고, 미래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고받게 될지 모르는 동기도 많이 생기고, 무엇보다 직무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기업은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연봉도 빼놓을 수 없는 메리트다. 내가 대기업에 취직하지 않았던 것은 '글을 쓰고 싶다'라는 욕망이 강했고 실제로 글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 대기업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인 대기업에 가고 싶냐고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물론 언젠가 가고 싶어 질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안정성'이 내가 원하는 가치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것보다 나는 더 치열하게 살고 싶고, 더 뛰어난 인재가 되고 싶다. 그러기에 스타트업이나 에이전시 같은 근무 환경은 꽤 만족스럽다. 특히 스타트업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충만한 이들이 많고, 그렇다 보니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스터디도 많을 뿐 아니라 회사와 조직 문화 내에서도 배움을 권장하고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스터디 및 콘퍼런스에 대한 금전적 지원, 업무 시간에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 등).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런 '열정적인 사람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 문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커리어를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안정성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연봉이나 워라밸 같은 것에 대해 욕구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길을 택하는 것이 너무 큰 리스크처럼 보여서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친한 친구가 이미 스타트업 씬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계의 자세한 상황을 듣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명문대생이 빠지기 쉬운 함정: 결국은 고시?


고시를 보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워낙에 불안정한 시대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100세 시대이지 않은가. 전문직을 갖거나 공무원이 되면 평생의 안정성이 보장된다. 그래서 많은 문과생들이 행시, 로스쿨, 고시로 빠지는 것이 공감이 되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현명한 결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부가 적성인 사람도 있다.)


이에 더불어,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은 때때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할 때 '이 정도 학벌에..'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 있었다. 잘 나가는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기도 했다. "너는 왜 명문대 나와서 스타트업에서 일해?"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질문이 있는 데에는 아마도 스타트업이 생소하고, 박봉인 데다 일이 힘들다는 인식이 한몫했던 것 같다(요즈음에는 잘 나가는 스타트업도 많아져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명문대생이 빠지기 쉬운 또 다른 함정은, 실패를 해 본 경험이 없어 완벽주의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실패를 경험하면 그것을 성장동력으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좌절해서 더 큰 구렁텅이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애초에 안전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건 아마도 인문학도야말로 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그것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발표에서도 네 명 모두 주도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개척할 수 있었던 데에 인류학에서 배운 '필드웍'과 그로 인한 '분석력, 통찰력, 모험가 정신'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낯선 곳으로 가서 직접 경험해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습득하는 것은, 인류학과에서 배우는 특별한 태도attitude이다.


인류학과뿐 아니라 인문학이 다 그렇지 않던가? 비즈니스에 그렇게 중요하다는 '관점과 시선'은 인문학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 비즈니스의 천재였던 스티브 잡스도 생전 뛰어난 인문학도 식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단순히 '불안해서' '전문성이 없어서' 고시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씁쓸함, 잘 알려지지 않은 진로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커리어 패스가 없다는 것은 축복일 수 있다


많은 인류학과 학생들이 취업을 할 때 수업에서 배운 것과 취업과 어떻게 연관 지을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다. 비단 문화인류학과뿐 아니라 많은 문과 학생들이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취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까?


데일 카네기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관계론>에서 소프트 스킬(Soft Skill)과 하드 스킬(Hard Skill)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네기에 따르면, 소프트 스킬은 공감 능력, 친절함 같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것이고 하드 스킬은 공격성, 적극성 같은 정량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드 스킬을 통해 얻은 결과는 눈에 잘 보인다. 그래서 전통적인 기업이나 상사는 하드 스킬을 좋아한다. (우리가 열심히 쌓는 스펙도 하드 스킬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CEO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들이 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하드 스킬만 있고 소프트 스킬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사업의 성공은 '고객의 말을 듣는 것,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그들과 관계를 쌓는 것'과 같은 측정할 수 없는 소프트 스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이런 소프트 스킬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어제 첫 번째 순서로 발표한 마케터 JannaBanana는 문화인류학도가 가진 능력을 아래와 같은 말로 표현했다.


우리는 transferable skill(이전 가능 기술)을 가지고 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라 이렇게 표시도 했다고.


"이전 가능 스킬이란 흔히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 팀워크, 분석력과 같이 여러 가지 업계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스킬이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엔터 업계든, 패션 업계든, 게임 업계든 팀워크에서 무척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우리 과는 그것에 특화되어 있다. 전혀 모르는 필드에 뛰어 들어서, 사회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빠른 시간 내에 깊은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다."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은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커리어에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나를 비롯한 발표자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실제로 강의 후 뒤풀이에서 교수님에게 문화인류학과의 취업률이 높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문들은 굉장히 다양한 필드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발표자들만 해도 각자의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고, 이런저런 사회생활의 고충이 있을지언정 스스로의 고민과 가치 기준으로 현재의 직업을 선택했기에 직무만족도가 높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인류학과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력이 길지 않아도 고민이 녹아든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후배들을 위한 커리어 밋업을 한다고 했을 때 발 벗고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취업할 시기에는 이런저런 걱정도 고민도 많은 게 당연하지만, 일단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다들 잘할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 들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이 핫한 화두가 된 것만 봐도 시대는 분명 바뀌고 있다. 문과에서 우리가 배우는 다양성에 대한 감각, 감수성이나 인간 본연의 것에 대한 통찰력은 점점 더 중요질 것이다. HR에서도, 마케팅에서도, 기타 어떤 분야에서도 인문학의 가치가 잘 쓰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과생만의 태도와 시선이 더 다양한 필드에서 쓰이면 좋겠고, 많은 문과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떤 활약을 할지도 무척 기대된다. 바로 이 이유로 단순히 잘 모르기 때문에 특정 진로를 선택지에서 배제하지 않으면 좋겠고, 또 어떤 선택을 하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발표자 중 한 명이었던 선배의 회고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어느 순간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에 가고 일을 하고 퇴근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매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장에 가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것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동시에 가장 끝까지 자기 생각을 밀어붙여본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확신하게 되었다. 사유를 밀어붙이고 고민해 본 경험이 내 삶에 어떤 탄성력을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래서 문화인류학과 출신 친구들이 정해진 전통적 커리어 패스가 없다는(경영학과나 신방과 등에 비해서) 불안에 떨다가도 자기 길을 잘 찾아내는 것은 아닌가 싶다."




p.s.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이상한 스타트업도 많기 때문에 커리어는 최대한 잘 알아보고 시작해야 한다. 내가 원티드에 있을 때 작성한 글 <스타트업에 신입으로 취업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5가지>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p.s.2 문과생이 개발자로 직무를 전환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마지막 발표자였던 Jennybe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녀의 발표 자료 'IT 업계에서 여성 개발자로 커리어 쌓기'를 허락을 받고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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