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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동 May 15. 2024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오다

미스터동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돌아보는. 어제를 기록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나와 진솔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마음에 스스로 안타까워했죠.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 끈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아무도 보지 않을' 이야기를 남겨두려 합니다.


5월 초.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왔습니다. 3월 1일에 맞춰 다녀올까 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핑계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꼭 다녀와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어 5월에서라도 찾아갔습니다. 해외여행을 하면, 이따금 그 나라의 아픔과 상처를 둘러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심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외면해 왔죠.


장렬한 태양이 내리꽂기 전, 5월 초의 날씨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따사로움과 뜨거움의 경계선을 오가는 동안, 산들바람이 그 경계를 넘지 않도록 저를 휘감았습니다.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가벼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독립문역. 초행자도 늘 다니는 길처럼, 서대문형무소 길목은 친절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 방향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봅니다.



이내 역을 빠져나왔습니다. 저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작은 공원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귀에 꽂힌 에어팟을 빼버렸죠.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저-기 서대문 형무소가 보였습니다.



볼록 거울에 태극기가 휘었습니다. 나라를 잃었던 당시의 모습 같았습니다. 그래서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뭔가를 저장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관념의 산물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더 중요시하기도 합니다. 유명 브랜드는 가격과 품질 경쟁에서 벗어나 어떤 스토리를 들려줄지 고민하고 있죠. 그리고 소비자는 강렬한 스토리에 열광합니다.


하기야, 하드 파워를 가진 자는 상대를 굴복시킬 순 있어도, 끝내 총체적인 설득을 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올림픽에서 수많은 금메달을 따내고, 세계 2위 경제대국임을 자랑하더라도. 우리에게 중국은 거대한 수출시장이자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일 뿐입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진 않죠. 


어쨌든 발걸음을 옮겨 서대문 형무소로 들어갔습니다.



입장권 3,000원. 우리나라는 역사관, 박물관에 대한 인심이 참으로 후합니다. 워낙 무료입장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은 지라, 3,000원이 비싸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5,000원입니다. 반나절 동안, 작가의 혼이 담긴 예술품을 마음껏 구경하는데 웬만한 커피 한 잔 가격보다 저렴하죠.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내에 있는 테라로사의 커피를 먹으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게 됩니다.


저 같은 문외한이 조금이나마 가볍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나, 이게 맞을까 하고 고민됩니다. 과거 유홍준 교수가 우리나라의 무료입장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라 지적하더군요.


당시에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냐고 말이죠. 어쨌든 '무료'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틀린 지적은 아닙니다.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재정적 독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은 관람객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그러한 태도가 모여 장소의 무게를 더하고 그 분위기를 정비하죠.


불현듯 얼마 전 다녀온 청와대가 떠오릅니다. 대한민국 권력의 일번지, 청와대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놀이터로 전락했습니다. 입장료가 없다 보니, 중국의 저렴한 패키기 상품에는 청와대가 꼭 포함된다고 하더군요. 한국 현대사의 중심이 시끌벅적한 시장통과 비슷해졌다니.


씁쓸한 마음을 지우고 서대문 형무소 전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시관 지하. 나라를 뺏긴 이들이 겪었던 당시의 상황을 구현해 놓았습니다. 손톱을 찌르고 뽑으며, 잠을 재우지 않기도. 때로는 앉을 수도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상자에 집어넣었다고 돼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믿고 싶지 않은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외면해 버리고 싶은 나약함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면, 저는 참 좋은 시절에 태어났음을 상기합니다. 휴전 중이지만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고 배고픔에 고통을 겪은 적도 없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벌어진 정도의 차이일 뿐, 근원적 생존의 위협을 느낀 적 없죠. 힘든 시기를 보낸 부모 세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지하독방에서는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재생됩니다. 어찌나 처절하던지.


옆에 서있던 어느 할머니께서는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그 모습이 민망하셨던지 저를 보곤 살며시 미소를 지으시긴 했지만요. 차가운 지하. 습한 공기. 절규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면서, 저 역시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렇게 전시관 지하를 빠르게 빠져나왔습니다. 외부로 나온 저는 중앙청사와 옥사로 갔습니다.



중앙청사·옥사. 사람들이 수감됐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도 이용되면서,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이랬을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 다만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에는 서대문 형무소의 아픔이 잘 녹아있습니다.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를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인상적인 외국인의 모습.
저 멀리 '격벽장'이 보인다. 격벽장은 수감자의 운동시설로,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위에서 바라보니,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뭔가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불과 100년 전, 누군가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공간 옆에, 누군가에게는 포근한 아파트가 즐비해 있으니까요. 빠르게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여기까지 오니, 서대문 형무소 관람의 끝이 가까워졌음을 알았습니다. 저- 높은 담장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문으로 자유롭게 나갈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죠. 하지만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는 과연 자신이 제 발로 나갈 수 있다며 희망이나마 꿈꿀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어가면, 참으로 괴로워집니다. 또다시 고통으로부터 회피해 봅니다. 비겁하게.


왼쪽에 '추모공간'이 보인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공간.

                    

사형장.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은 실제 사형이 집행된 건물입니다.



사형장 앞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 설치된 설명문을 읽어봤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서대문 형무소였기에,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을 통곡하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져 교도관 사이에서 전해 내려왔다. 심어진 시기는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입니다. 심어진 시기가 1950년대라면, 해당 나무와 독립운동가와의 관계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의 설명은 착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실제 독립운동가가 사형장 앞에서 통곡했는지, 아니라면 일제강점기 이후에 해당 나무가 심어졌는지 헷갈리게 하죠.


궁금한 마음에 찾아보니, 통곡의 미루나무는 해방 이후에 심어진 나무로 밝혀져 있습니다.


1920년대 찍힌 사진에는 통곡의 미루나무 모습을 찾을 수 없는데요. 당시에는 어린 묘목이라 사진에 담기지 않았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1945년 미군 항공사진에서조차 통곡의 미루나무는 없었습니다.


이는 서대문 형무소가 고쳐야 할 점이었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전체의 정보를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해보자면, 일제의 잔혹한 면모와 대비하여 우리의 한을 강조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오만하게 기록하면, 자칫 소설이 되어버릴 수 있기에 다소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사형장 내부는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사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사형장 내부. 1987년까지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나무 의자에 앉은 뒤, 이내 검은 천막이 가려졌을 테고요. 마루판은 '덜컥'하며 아래로 푹 꺼졌을 겁니다. 그러면 허공에 발버둥 치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을 테죠. 잠시 후, 왼쪽 공간으로 사람이 지하로 들어가 매달린 시신을 수습했을 겁니다.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총 195명이었습니다. 이중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 18명이 속해 있죠. 잠시나마 그들의 영면을 기원해 봅니다.



여성들이 수감돼 있던 여옥사. 8호실은 그 유명한 유관순 열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당시 그는 17세 소녀였습니다. 어쩌다 꽃다운 나이에 그리 됐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돌이켜 보면, 제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유관순 누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면 유독 더 아리죠.


그런데 8호실은 유관순 열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투옥됐던 곳인데요. 어쩌면, 지나치게 유관순 열사만 예우하는 것이 아닐지 고민케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는데요. 문재인 정부로부터 1등급 대한민국장을 재차 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유관순 열사에 대한 훈장 등급이 지나치게 낮다고 지적된 것이 1등급 훈장 추서로 이어지는데요. 그럼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라는 점이 크게 반영되어 이중 서훈됐다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물론 추가 서훈(공적)이 있다며 지난 정부에서 설명하긴 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훈장은 서로 다른 이유로 추서됐으니 이중 추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실상 사후 공적이 포함되면서 논란이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유관순 열사의 훈장 등급에 맞춰 모두 하향 조정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봉사활동한 친구 5명 중 1명에게만 사탕 10개를 주고요. 나머지 4명에게는 사탕 2개씩만 줬다고 해봅시다. 여기서 사탕 지급이 불균형하다고 하여, 사탕 10개 받은 친구에게 사탕 8개를 돌려받아야 할까요.


혹은 똑같은 봉사활동을 했을지라도, 어쩌다 친구 1명의 행적이 유독 크게 알려져 봉사활동 지원자 수가 크게 늘었다면. 이때는 어찌해야 할까요. 봉사활동 자체에 국한돼 평가해야 한다면, 그것이 상훈의 진정한 취지와 맞을까요.


아니라면 친구 5명 모두에게 사탕 10개씩 주는 것은 어떨까요. 이건 바람직할까요. 하향 조정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상향 조정이 되면 사탕 개수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으니. 이마저도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어찌 됐든,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유관순 열사의 결기를 생각하면,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단체 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저는 서대문 형무소 바로 옆에 있는 '독립문'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걸어서 5분 거리죠.


독립문의 독립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과 성격이 조금 다른데요. 중국(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 성격이 강합니다. 당시 <독립신문> 논설에서는 오히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 감사한 나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백성이 일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다만 독립문의 독립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르러서 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으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독립문을 대대적으로 수리까지 해 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뒤에서 얘기해 보죠.


현재의 모습, 영은문의 기둥만 보인다.(오른쪽), 과거의 영은문(왼쪽)


독립문 앞. 영은문 기둥이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사신이 오면, 영은문을 통과했습니다. '황제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을 사대事大한다는 상징이었죠.


사실, 영은문은 '영조문'이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 당시 명나라의 사신을 영조문 앞에서 맞이했는데요. 하지만 중국에서 '영조'를 지적하면서 '영은'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영조는 '왕(황제)의 문서를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국 측에서 '격'을 따지는 바람에 '황제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인 영은이라고 하게 된 거죠.


돌이켜 보면,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 조선은 그야말로 중국의 그림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은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으니, 지금의 관점으로 역사를 평가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국 유학이 사실상 최고의 엘리트 교육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됐습니다. 그야말로 조선 500년에 있어 역사적인 일이죠.



독립문 뒤로 고가도로가 보이는데요. 과거 서울 출장을 올 때마다, 저곳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서울의 개선문이라고 떠올렸죠.


실제로 독립문은 프랑스의 에투알 개선문을 토대로 설계되었습니다. 에투알 개선문은 1836년에 완공됐는데요. 우리의 독립문은 1898년에 완공됐죠.


어쨌든 독립문은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으로 개념이 확장됩니다.


그런데 일제는 당시 엄청난 거금이라고 할 수 있는 4,100원을 투입해 독립문 수리에 나섭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1936년에는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하기도 합니다. 조선의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들었던 일제가 어찌 그리 했을까요.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을 내쫓은 일본은 한반도에 상주하기 위한 명분이자 상징으로 독립문을 활용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나라=일본'으로 인식되게끔 말이죠.


독립문 편액.


사실, 제가 독립문을 가까이서 보려고 했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독립문의 편액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방식으로 읽으면 '문립독'. 저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어, 필체를 두고 '이나, 아니다'로 논쟁 중인데요.


이완용이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긴 합니다.


독립문을 세우기 위한 독립협회가 결성되는데요. 1898년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까지 오릅니다. 여기에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의 형제 이윤용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가장 많은 돈을 냅니다. 게다가 이완용은 명필가로 익히 유명했으며,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니 '독립문'을 적을 명분이 충분했죠.


어찌 됐던, 자주 독립의 상징을 세우는데 앞장섰던 그가 나라를 팔아먹는 작자가 되다니. 역사의 소용돌이가 제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퍼졌습니다.



이번 발걸음의 마지막. 독립문 밑으로 지나가봤습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니, 남성 2명이 앉아있더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은 속이지 못합니다. 척 보면 척이죠. 정보경찰이었습니다.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려다가 멈췄습니다. 일부러 티 내지고 않고 있는데, '난 당신이 경찰이라는 걸 안다'고 하면 괜히 의심살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왔던 길을 따라, 그대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기록도 여기서 끝이죠.


다음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갈 계획입니다. 그럼, 그때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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