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의 어원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애초에 지배계층의 억압을 힘겹게 감당해야 했던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농장의 일꾼이었던 그들은 끊임없는 핍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지배자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으나 지배계층은 이러한 생존의 몸부림을 "악행"으로 규정했고 '악인'으로 낙인찍었다. 빌런은 지배계층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매체에서 영웅을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원을 인식한 탓인지 그들이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충분히 그려주면서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직하고 공정하며 심지어 사회 체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처럼 보인다. 반면 사회의 모순을 비꼬고 그 틈을 파고드는 자들은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결국 쉰소리를 하는 미치광이나 괴짜 혹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악으로 치부된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스스로를 '착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라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기를 바라고 심지어 먼지 한 톨 묻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들은 기존 질서에 자신이 포함되기만 한다면 혁명의 시계를 기꺼이 뒤로 미룬다. 기존 사회의 병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혁명은 반드시 피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곳에는 급진적인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기도 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혁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이러한 개량주의적 입장은 사이비 지식인이 보여주는 영합주의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정관념화된 사회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 틀을 깨뜨릴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라 보에시가 꼬집은 ‘자발적 복종’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세상의 변화는 잠시 뒤로 미뤄두는 일. 모든 것이 잘 흘러가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부정성이라는 불편한 과정을 회피하고 긍정성만을 과잉 생산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승자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 ‘빌런’으로 기록된 자들을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광인이나 악마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어쩌면 그들이 내세웠던 광기 어린 주장이야말로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최선 혹은 최후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기억의 광장에 동상으로 세워져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한 구심점이 되기를 꿈꿔 본다. 하지만 영웅이 되어 지키고자 한 질서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누구를 위한 질서였는가.
지금 우리가 ‘정의’라고 믿는 모든 법과 질서가 애초에 탐욕으로 가득한 힘센 자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만들어내고 강요해 온 폭력적인 명령이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말 영웅적인 것인가. 어쩌면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빌런이 되려는 결심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