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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은 내가 죽어도 아이가 잘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

by 정선생

권위적 정부 권력의 역사적 과오와 만행 등으로 얼룩진 근현대사는 우리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짜증 많은 어머니라는 현실 속에서 인자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이상향을 설정하여 왔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 소개 같은 숙제를 해 오면 엄격하지만 다정한 아버지와 언제나 다정한 어머니...라는 식으로 발표했던 것 같다.


학생들의 행동은 모두 마음에 자리 잡은 심각한 상처 때문이고, 폭력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저지르는 극단적인 인정욕구의 표출일 수 있다는 명제는 아이들에게 이중의 폭력을 행사했다. 하나는 아직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은 문제도 심리적 병명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 못하고 다리를 떨면 주의력집중장애 판단을 받고, 친구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면 부모의 폭력성을 보고 배웠거나 그것이 내면화되면서 감정조절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처럼 모든 아이들은 성장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마음의 병을 얻었으므로 그들을 향한 훈육은 반드시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선생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소리를 지를 수 없고, 벌을 줄 수 없으며 하기 싫어도 참고 견뎌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모두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애비게일 슈라이어의 『부서지는 아이들』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 초중고에서 목격하는 '금쪽이'들을 돌아보게 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지식인(사르트르가 말하는 사이비 지식인)이거나, 그러한 지식을 정책에 반영한 사람들(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순진한 정보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거나 포퓰리스트)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문명 또는 문화적 존재이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은 추상적인 목표를 이상화하면서 나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랑과 배려, 진심 어린 지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쉽게 부정당한다. 그리고 균형 잡힌 결론은 사실상 무기력하다. 주장은 언제나 강렬해야 한다. 강렬한 주장이어야만 절충안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이 아쉽다. 친밀한 관계를 복원하라고 말하고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없애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다른 책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출판시장의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이런 내용을, 저 책은 저런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대신,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을 거부하고 다소 지루하고 거칠고 어설펐던 과거의 경험 형태의 의미를 되짚어보자는 담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발견하면 충분할 것 같다.


물론, 그 과거의 끝에는 야만적이라고 할 만큼 거친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크게 혼나서 울다가 잠든 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도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큰 소리로 화를 내며 밥상을 엎어버리고는 어느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홀짝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던 그런 시절 말이다. 그처럼 은밀한 사랑이었으므로 부모의 죽음 직전이나 이후에나 매우 어렴풋이 원망스럽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

그것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동물의 양육과 다르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도 앞 세대는 강인하게 성장했고 삶을 잘 살아냈다. 그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완전한 문명과는 거리가 멀지만.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트라우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은 자라면서 트라우마를 갖는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가 반드시 한 사람을 무너뜨린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그 트라우마가 뜻밖의 원동력이 될 수는 없을까? 그건 모두 이후에 관계 맺는 세계와 타자의 상황에 달렸으리라.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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