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2024)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부하를 앞에 두고 300년 간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무능한 왕과 위정자들보다 3년 만에 수많은 발전을 안겨준 자신을 향한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읊조린다. 그러면서 역사상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마다 좌절하고 말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의병이었다고 말한다. <한산 리덕스>(2022)에서 '항왜 준사'가 전쟁의 이유를 묻자 이순신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답하였다. 국가와 국가의 싸움이 아닌 의와 불의의 싸움. 이 말에 준사는 항왜가 된다.
국가와 국가의 싸움과 사람이 마땅히 꿈꾸어야 할 세상을 향한 분별 있는 인식은 <하얼빈>(2024)에서의 안중근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포로로 잡았던 모리 중사와 부하들을 풀어 주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에 의해 동지들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한다. 그와 대립하는 동지(극 중 이창섭)를 향해서 일본인 모두를 죽이는 것이 아닌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목표는 분명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이라는 '사람'의 구분을 전제한다. <동주>(2016)에서 윤동주가 식민지 청년으로서 보여준 고뇌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할 수 있다. 일본인과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일본(국가)은 적이지만 일본 사람은 그저 이웃일 수도 있던 것이다.
타인(타자)은 적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 단계를 설명하는 수많은 저서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연대의식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다. 서로 연대하려는 욕망조차도 결국 자신의 생존을 향한 이기심에 기초한 선택일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함께 연대감을 드러낸다. 영원히 남일 뿐이기에 그들은 영원한 적도 동지도 아닌 그저 '남'으로 나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껄끄럽다. 그 타인의 정치적 견해, 문화적 경험, 세대, 성별 들이 그 사람 자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가장 순수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지닌 본연의 인간(성)이란 아마도 절대적 고독에 놓이는 순간일 텐데, 그 절대적 고독의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그가 갇힌 방문을 여는 순간 그가 지닌 본연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마주할 때 꺼내는 그 모습만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오해가 쌓인다. 증오가 쌓인다.
만약 나 자신이 절대적 고독에 놓인다면 어떨까. SNS를 이용한 비물리적 연결마저 사라지는 절대적 고독의 순간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이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움이 밀려와 타인을 향해 다가갈 때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역시 실망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실제 모습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자신이 절대적 고독에서 마주한 모습이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이라면 같은 인간인 타인도 절대적 고독의 순간에 그러할 것이다.
절대적 고독의 문을 열고 우리(나든 남이든 인간으로서 우리)가 타인(나 아닌 남)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나의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이 제거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기심을 인정함과 같이 남의 이기심도 인정해야만 표리부동하지 않은 윤리적 실천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실천은 어렵다. <마이멜로디&쿠로미>(2025)에서 피스타치오가 남을 의식하면서부터 느꼈던 욕망과 마이멜로디의 다정함을 향해 보였던 불신과 의심처럼, 우리는 나가 아닌 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남을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경지를 마주할 수 있다고 감히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마이멜로디의 친구들이 행복한 것을 보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그 말조차도 타인을 이용한 행복추구라고 느끼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