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한민국의 코로나 19 관련한 국가 방역 정책을 두고, 일부 유럽 국가(아마도 프랑스)에서 이를 지나친 국가주의로 인한 인권 침해라고 우려했다는 사례가 있었다. 그들은 국가 방역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정보가 활용되는 모습을 보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현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개인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개념에 입각한 정당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망각한 주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면서 뒤늦은 방역을 실시하고, 이른바 ‘록다운(LOCKDOWN)’을 시행했다가 국민들의 거센 항의와 불만에 조치를 완화하면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나라 중 자유의 중요성을 그토록 부르짖는 그들 국가가 포함되었음을 떠올리면, 어쩐지 그들의 주장이 모순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SBSCNBC, 6.10.)에서는 이택광 교수와 슬라보예 지젝의 화상 대화가 방영되었다. 여러 내용이 오갔지만, 그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과 동시에 '인권'이라는 개념도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맥락이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조금만 잘못 읽으면 이른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전환하자는 것이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지젝 역시 이를 인식했는지(사실 그동안 그의 주장들을 놓고 보면 이런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코뮤니즘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코뮤니즘이란 북한 혹은 중국의 그것은 아니라고 첨언했다.
사실 ‘자유’의 중요성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고, 아주 오래 전부터 다루어졌던 철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남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타인(여성, 노예 등)’의 부자유가 필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그러나 푸코의 『성의 역사 2-쾌락의 활용』(나남출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의 자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발생한다.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남성’은 ‘체면’과 ‘사회적 지위’, ‘타인의 평판’ 등을 이유로 스스로의 자유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러한 자기 제약으로써 여성에게 비록 남성 시민의 그것과 동일한 수준이 아니었더라도, 가정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나마 일말의 자유가 주어졌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누렸던 그것과 여성의 그것이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푸코와 함께 나도 강조한다).
사실 노예 신분이 근대 초기에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자신보다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민족이나 인종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억압하던 제국주의적 침략이 (형식적으로나마) 사라진지 100년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자유’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로까지 나아가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심지어 미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우리가 ‘자유’를 ‘완전한 해방’이라고 생각할 때, ‘무질서’와 ‘혼돈’이 뒤따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예의 해방’이나 ‘여성의 해방’이라는 단어가 기존 질서에 관련한 어떠한 내용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어떠한 형식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방종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이끌어가는 것은 잘못이다. 무정부주의라는 것조차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어느 스승의 말도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따라서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도달하려는 지점은 ‘주인(만)의 질서’, ‘남성(만)의 질서’를 거부하고, ‘모두가 주인으로서 구성한 질서’, ‘남성과 여성이 합의하여 만든 질서’의 추구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듯싶다.
다시 처음의 내용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 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가 방역에 나선 것은 자유를 말살하고 인권을 침해한 국가주의적 폭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표현이 너무 지나치다면, 이렇게만 묻자. 우리의 행동이 그들에게 비난받아야 할 일이었을까?
지젝이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처럼) 국가 공동체의 방역을 위해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민을 사찰할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는 국가기관들이 그것을 국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제 아무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듯 보였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자유를 지속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제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면, ‘사회주의화’, ‘공산주의화’를 염려하며, ‘종말론’까지 들먹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가짜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만 볼 때 그들은 코로나 19의 심각성 자체가 국가주의에 입각한 거짓이며,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도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 방역 지침을 무시하고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고, 마음껏 자신이 누리고 싶은 생활을 영위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짜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영역에까지 그대로 적용되어 복지정책 없이는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또 다른 ‘폭력’이 되고야 만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위해서는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통제는 공동의 합의를 통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의 코뮤니즘이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자유’가 있다면, ‘국가 지침에 따르기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도 분명 존재한다. 어쩌면 일부 유럽 국가에서 걱정했던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란, 시민들이 공동체의 안전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한 자유, 공동체의 안전이 확보되었을 때 그 속에 있는 개인의 자유도 더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음을 아는 성숙한 이성적 판단에 대한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질투라는 말이 가볍게 들린다면, 그들의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코로나 19는 WHO가 코로나 19가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그 ‘자유’가 언제든지 제한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코로나 19가 아니더라도 어떤 바이러스가 우리를 부자유의 상태로 내몰지 알 수 없는 시대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여러 석학들이 지적하듯,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지나치게 자유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타난 예정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진지한 생각,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성숙한 자유인이 되기로 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은 ‘인간 대 인간’을 넘어, ‘인간 대 자연’에 관한 새로운 관계의 모색까지 아울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