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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24. 2020

나를 버린다면, 세상의 고통도 사라질텐데

작년, 겨울 계약이 만료되어 갈 즈음 연구실의 책을 집으로 옮기거나, 정말 안 볼 것 같은 것은 버렸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상당히 많이 버렸다. 물론, 언젠가 이 집을 떠나 더 많은 공간이 생기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 넓은 공간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공간을 갖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늘 이 건물에 있던 한 노교수가 자신의 연구실 두 칸을 모두 비웠다. 그는 이제 명예교수직까지 마감하고 이 학교를 떠난다. 연구실 두 칸을 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자리가 반드시 그 공간의 넓이만큼 허전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가 연구실 한 구석에 앉았을 책상 정도가 그가 떠난 빈자리의 진짜 크기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내가 죽으면 지금까지 보던 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웠고, 지금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친구나 가족은 이곳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단순히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궁금했고, 나아가서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이건 정말 지금도 느끼는 고통 중 하나다.

쉽사리 떨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는 생을 향한 집착을 만드는데, 이 집착은 타인에게도 고통을 준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 이 세상을 더 완전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할 때면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괴감을 느낀다.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완전히 평온한 삶을 살다가 가는 사람은 죽음을 여러 모로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성공과 훌륭한 평판을 기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한 삶의 토대를 어느 정도 마련하고 나의 죽음 이후에도 그들이 행복하게 삶을 지속하리라 믿으며 죽음을 준비하고 눈 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훌륭한 평판’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 앞에 단순히 그의 부만 탐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준비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맞서는 자는 두려움을 없애버릴 것이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자는 결코 어딘가에 정착하여 무언가를 남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는, 그래서 아직도 종종 다양한 재난을 상상하고, 그 속에서 최후를 맞는 나의 다양한 순간을 상상하는 나는, 여전히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나의 죽음이 그렇게 고요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언제부턴가 자꾸만 나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죽음이야말로 나의 죽음일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 성공적이지 못했던 나는 어쩌면 나 스스로를 그런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까지도 나는 인간관계에 성공적이지 못하고, 나의 인간관계는 반드시 슬픈 결말에 다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슬픈 생각 혹은 자기 비하적인 생각은 나를 생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건 역설인데, 왜냐하면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적대적인 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도록 이 지상에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가장 나쁜 인간이 가장 오래도록 지상에서의 삶을 이어나가리라 꿈꾼다는 사실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베푸는 삶을 살던 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던 가해자들을 뒤로하고 스스로 지상을 떠난 이들도, 결국은 이 땅에서 그들을 처단해 버릴 모진 마음을 품지 못한 ‘날개 잃은 천사’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릴 적 다른 사람의 눈알 뒤에 들어가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내가 그들의 눈알 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나의 육신을 버리고, 이 지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몸뚱이를 버릴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원하는 누군가의 육체 속으로 혹은 그의 육체에 겹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나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의 의식만을 관찰하며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영혼은 진정한 구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현재의 고통은 결국 나의 육신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감각 정보로 구성된 어떤 정보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나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느끼기를 포기하고, 단 하나의 신체기관도 없는 어떤 무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다른 이의 의식을 훔쳐보기로 할 때, 비로소 이 땅의 수많은 차이와 차이, 또 차이를 경험하며 진정한 사랑에 가까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이 되어 바람이 거세고, 이제 곧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무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조리 내어놓을 수 있기에, 또 다른 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하찮은 목숨을 내버리기만 한다면, 진정으로 사랑이 넘치는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나를 버리기가 이렇게 어렵다. 나를 버리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사라질 텐데 말이다.


방에 또다시 책이 많이 들어찼다. 이제 책을 또 집으로 옮기거나, 적절치 않다면 버려야만 할 것 같다. 어딘가에 나의 흔적을 많이 남기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아름다움이 남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겠다. 어쩌면 지금이 세상에서 나의 자리를 비워가기에 가장 좋은 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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