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Sep 23. 2020

우울과 신경질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의 감정들

우울한 감정을 느끼기 쉬운 요즘이다.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공기가 뼈에서 살을 떠내는 예리한 칼날마냥 나를 괴롭힌다. 한낮의 햇살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할 공기란 차가운 아침과 저녁, 심지어는 밤에만 있으니까. 

우울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의 침잠이고, 우울감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자유를 향해 도약할 수 있다. 그 내면 깊숙한 곳, 숨 막혀 의식을 잃을 듯한 지점에 비로소 ‘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마주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유를 누릴 수도,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를 결심할 수도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던 살기 좋은 시대에는 ‘우울’이 일종의 낭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으리라. 가을과 겨울의 우울한 풍경은 도리어 봄의 설렘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사계절의 뚜렷함을 느끼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단순히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 같은 문제를 들먹이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 일상 자체가 이미 사계절의 흐름을 체감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환경(環境)’을 굳이 ‘조경(造境)’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인간의 삶이란 자연의 순리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마주하는 환경이란 대체로 인간의 손길이 닿았고, 나무 한 그루조차 진정 스스로 말미암은 상태인 경우가 드물다. 그러니,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조경함으로써 얼마든지 감정이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우울’도 결국 스스로의 환경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따라 극복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이 인간의 감정에 부정적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이야기 되었기에 낯설지도 않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심지어는 도시계획에 관련한 행정적인 업무든 간에 말이다. 도시에서의 생활에서 ‘녹지(綠地)’를 찾으라거나, 자연적인 흐름에 맞추어 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천천히 걷기보다는 빨리 걷고, 빨리 걷기보다는 자동차를 선택하는 도시에서, 여유로운 시간 자체는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업무도 생활도, 사랑도 성장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차라리 도시의 시공간이 요구하는 순리에 맞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 정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물론,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길이 아니냐고 비판하겠지만, 도시생활에서 인간다움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닐까. 인간다움이란 오히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으려고 할 때에야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도시에 사는 사람은 신경질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예민하고 화를 잘 내고, 쿨 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화를 잘 내니, 쿨 하게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도시 생활이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에서 배려와 위로, 사과 따위는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경쟁하고 있으며 건물 밖을 나서거나,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마스크’를 쓰고 진정한 얼굴을 가려야 한다.


결혼은 아주 많은 것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적어도 젊은 시절 망나니 같은 생활을 접고 가족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애쓰라고 요구한다. 그 요구에 맞추려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잃어버린다.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배우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도시의 부부생활이란, 다른 모든 도시생활이 그러하듯, 누구 한 사람의 우울을 책임져 줄 만큼 여유 있고 관대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의 우울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바빠지기를 선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차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내면 깊숙한 어둠 속에서 ‘나’가 올라와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집안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힘겨운 시간을 보내라고 강요하는 일 자체가, 도시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의 아내가 그러한 삶을 충분히 살아낼 것처럼 보였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함을 상기하고 다시 살펴봐야 한다. 아내가 정말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각오를 한 그런 ‘여성’인가라고 말이다. 물론, 남성 역시 우리들의 아버지처럼 가족을 경제적 어려움에서 구해내기 위해 일생을 바칠 수 있는지, 가족과 정서적 유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지 말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그러한 아버지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았는가. 아들딸과 대화하고 싶어도 체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착각에 짐짓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던 아버지들 말이다.


결혼 생활은 그 자체로 우리를 여성주의 윤리에 빠져들게 만든다. 남성에게는 자신에게 강요된 남성다움이 진정 스스로 선택할 만한 길인지를, 여성에게는 스스로 현모양처를 꿈꿨다고 자부하는 여성에게조차 과연, 자신은 사회가 규정한 남성의 역할을 조금도 욕망하지 않는지를 묻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저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그를 위한 진정한 육아, 보육, 교육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을 말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깊은 사유 끝에 도달한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남자다움을 강요받지 않는 아이,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자다움과 여성스러움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체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그 누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각 가정에서 밀려들어오는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가 끝내는 사회 전체의 변화를 부르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다. 이런 생각을 말하면, 끝내는 자신만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지만, 그래도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도시는 우울로 가득하다. 우울의 그늘은 우리 모두의 가정에도 예외 없이 드리운다. SNS에 표출되는 밝고 온화한 싱클레어의 가정을 나는 믿지 못한다. 그 밝음 속에는 진정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천진난만함이 있거나, 언젠가 목격한 자신의 잿빛 얼굴을 지우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보일 뿐이다. 

나는 우울하지 않으나 지나치게 신경질적이다. 그래서, 말 못하고 웅크린 우울한 가족을 보듬을 능력이 없다. 따라서 나와 함께 사는 그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고, 나는 그것을 묵인해야만 한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일을 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어차피 남임을 확인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놀지 못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