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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ug 07. 2020

놀지 못하는 마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서는 못 노나니”라는 노랫말이 있다. 지금처럼 모든 연령에 놀이를 강조하는 시대에도 크게 공감된다. 

물론 ‘놀다’라는 말이 삶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짐작건대, 장자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형식에 얽매지 않고 소통하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자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으로 놀라고 말할 때는 ‘놀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조차도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음을 질타해야 한다. 김광석의 <일어나>에는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라는 가사가 있다. 가볍게 살자는 좌우명이 자신을 진퇴양난에 빠뜨릴 수 있다. ‘놀다’와 ‘놀지 않다’, ‘가볍다’와 ‘무겁다(진지하다)’의 구분조차 없이, 어느 하나에 가치를 더 혹은 덜 부여함도 없이, 그저 상황에 따라 살아감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다.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 살아 있는 걸”이라는 뒷문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가볍게 살겠다는 다짐은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좌우명이다.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선언이 “세상의 평가에 얽매지 않고 가볍게 살겠다”로 완성된다.

그러한 다짐이 스스로를 얽어매고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음은 당연하다. 다짐이란 무른 것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다지는 일에는 두드림이나 밟음이라는 강제력이 존재한다. 이 강제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드는 ‘다짐’은 그 자체로 이미 부자유다. 의연한 척, 대범한 척하며 세간의 평가를 외면할수록 자신의 평판도 쌓이고, 반대로 속은 썩어 문드러진다. 


요즘 예전처럼 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활이 편하지 않음을 한탄했음이 아니다.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여전히 수치상으로 내세울 것 없는 인생임에도, 반려자와 자식, 노쇠해 가는 부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다져진 모양이다. 마음이 충분히 놀지 못하니 웃음이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지니 가족도 웃지 않는다. 웃지 않는 가족을 보니 내 마음은 더욱 놀지 못하고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날카로운 신경질이 남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재미있어하는 아들처럼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아들의 놀이를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니 어리석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놀이를 방해하는 일이 잦아짐일 것 같다. 아이의 놀이에 규칙을 부여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굳히려는 욕심. 그 욕심은 또 나의 마음이 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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