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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Dec 04. 2020

손톱

  손톱이 제법 많이 길었다. 스스로도 놀랍고, 이를 바라보는 가족도 신기하게 여겼다. 혹은 대견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손톱을 물어뜯었다. 잘근잘근 씹었고, 때로는 먹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버릇이었다. 때로는, 동생과 비교를 당하면서까지 꾸지람을 들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10여 년 전 겨울, 정문 초소에서 물어뜯은 손톱을 난로 위에 올렸다. 화장터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내 육신이 재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냄새를 풍기겠다 싶었다. 초소 안으로 들어오던 후임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인상을 썼다. 언젠가 내 손톱이었음을 알게 된 이들이 비난하기도 했다.


  손톱 물어뜯기는 불안감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담배를 배우지 않은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담배는 고약한 맛과 냄새를 견뎌야 했지만, 손톱은 나의 몸이기에 거부감이 덜했다. 더 이상 물어뜯을 수 없을 만큼 손톱이 줄어들면, 옆으로 옮겨갔다. 긴 글을 읽거나 쓸 때면, 열 손톱으로는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손톱 밑의 살갗도 뜯었다. 생살이 드러나 따갑거나, 피가 어리면 그만두었다. 그런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면 고통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은 역설적으로 손톱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향한 부끄러움이 나를 더욱 위축시켰고, 이는 곧장 긴장으로 확장됐다. 긴장을 달래기 위해서 끊임없이 손톱을 찾았다. 아직 피울만한 꽁초를 기대하며 재떨이를 뒤지는 사람처럼, 나는 손톱을 이리저리 살폈다. 단 한 번이라도 뜯어낼 수 있는 손톱을 보면 나는 거침없이 입을 가져갔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손톱을 물어뜯는 행위가 줄었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몽땅한 손톱을 보고 뭐라고 했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손톱을 길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열등감에 절어 있는 스물 후반 청년이 한 여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고됐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며 자랑한 후에는 어김없이 다퉜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손톱을 다시, 물어뜯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면 뜯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대로,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결혼을 하면서도 내 심리는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다. ‘준비가 되면 결혼한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준비’가 필요했던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안정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손톱을 길러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존재했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으면 강박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없다.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이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손톱은 건강한 마음의 양분을 먹어야만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 그렇게 자라난 손톱은 평온한 마음을 가진 손톱깎이 정원사에게 손질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양분을 충분히 마련하지도 못한 채, 오류투성이의 논법을 세우며 손톱을 지키려고 했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손톱은 더욱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육아를 공유하면서 물어뜯었던 손톱을 어린 아들에게 들킨 것이다. 아들은 손톱을 물어뜯었고, 나를 보고 배웠음이 수치스러워 손톱을 끊었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에도 균열이 가득하다. 그 원인을 순전히 나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한 인내심이 곧장 화를 표출한다. 아들에게 더욱 무서워지고 이를 지켜보는 아내도 마음이 남아나지 않는다. 손톱이 멀쩡해진 것이 아니라, 손톱에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인가.


  나의 손톱은 지금, 37년 평생 가장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어릴 때부터 고문당한 손톱이기에 원형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남은 부분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지는 느낌이다. 잦은 사고를 부르는 술을 끊었고, 담배는 애초에 배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유흥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게임을 엄청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나마 즐기던 게임도 이제는 시시해졌다. 글을 쓰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조용한 시간을 찾고 싶을 정도로 충분한 소음이 삶에 없는지도 모른다.


  열등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심리는 아무래도 자존감 없음과 맞닿아 있는 듯싶다. 언젠가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차를 타고 싶다고. 아내에게, 아빠 차는 오래돼서 소리가 나는 것이냐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듯하다. 할아버지는 차에서 동요를 들려줬기 때문인 것 같다는 아내의 판단에 동요 시디를 준비했다. 그렇지만 어린이집에 다니고 나서는 주말에도 쉽게 나들이를 가지 못했고, 나들이를 가려고 하다가도, 할아버지 차를 타고 싶다는 말만 연신 해대는 아들에게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어린 아들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게 무슨 소리냐며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로서는 상처가 된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롭고 이기적으로 느껴진 것은 물론 나의 비뚤어진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들은 장난감을 사용법대로 가져 놀지 않다가 짜증을 내기도 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다가 좌절감을 느껴 짜증을 내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짜증을 냄과 동시에 물건을 던졌다. 이 행동도 나에게서 비롯했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부정하지 않았다. 장난감을 치우지 않고 놀다가 장난감 때문에 짜증을 심하게 내면 치우는 과정에서 던지기도 했고, 평소 씻으러 들어가면서 탈의한 옷을 바닥에 툭툭 던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던진 적은 없었는데, 어린이집에 가면서 아이의 행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의 행동이 마중물이 되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놀이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야단을 치는 중에 당신에게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는 말이 뇌관을 건드렸다.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결국, 근근이 유지하던 평화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 아버지의 모습은 오직 확실한 경제력을 갖춘 아버지뿐이다. 아버지는 물심양면 나를 키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어릴 적 나는 그저 물적인 면에서만 아버지에게 길러졌다고 생각한다. 백화점에 가서 신발을 고를 때, 좋은 것을 고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당당함은 내가 보고 배운 아버지의 전부다. 아버지와 산책 가서 찍은 행복한 표정의 사진도 많지만, 어쩐지 갈수록 어두워진다. 아버지도 나에게는 폭군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배운 난폭한 남자의 모습이 군대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늘 존재했다.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고 했지만, 나는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야단을 치고, 화를 내고, 반성하고 노력해도, 격정적으로 화를 내는 주기가 또다시 찾아왔다. 짐작건대, 내 생활 중에 ‘트리거’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격발 된 화가 가족을 향해 날아간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을 알지만, 결국 남성은 결혼을 통해 더없는 안정감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그 안정감은 “당신이 최고야, 다 잘 될 거야!”라는 내조도 아니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 나도 힘을 보탤게.”와 같은 동료의식도 아니다. 그저, ‘침묵’ 인지 모른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혹은 몇 달이든, 저도 스스로 노력하고 애쓰고 있겠거니 바라봐 주는 일. 물론, 그것은 아들에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아내에게 해야 할 일임을 안다. 내가 그렇게 못하는데, 그들은 오죽할까마는…….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것뿐이잖아”라는 비난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나는 60년대 못난 가장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가 된다는 건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결혼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라는 말을 ‘준비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라며 반박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아마 그 말은 단순히 ‘직업’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직업’을 구해야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음을 의미했던 것 같다. 혹은, 결혼을 위해서는 성인에 가까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중년이 되어서 결혼하는 외국인의 영상을 보았을 때, 어쩌면 결혼은 저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서관 수업으로 만났던 중년 선생님들이 오랜 부부생활의 내공으로 신랄한 말을 쏟아냈다. 한편에는 30년이 되어도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들려주는 부부의 이야기는 내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부모로서의 이야기도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부부도, 그런 부모도 아님을 생각하며 씁쓸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사실이겠지만.


  삶이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다. “당신은 사계절을 다 타는 사람이잖아요”라는 이해의 말도 나에게는 사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때, 그 사람은 어떻게든 스스로를 조정 혹은 조절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자판에서 떨어지자, 그는 손톱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린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 어쩌면 피를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면 마음이 진정될 것만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유린당한 손톱을 보면 반드시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초조하게 손톱을 만지다 주먹을 쥐는 그에게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참아야 한다. 혼자 마시는 술도,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도 싫었다. 술은 마취제일 수는 있어도, 치료약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참으면 손톱이 남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주먹을 펴고, 그가 다시 손톱을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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