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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Oct 27. 2021

손톱, 그 후

지금의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즐겁다. 내일의 나도 불안하지만 즐겁다. 내일이 불안하더라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아무 일 없는 오늘이다. 웃을 일 없는 회의에서 웃음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정용호 선생은 왜 웃느냐고 한 마디 들었다. 그냥 생각하니 재미있어서 웃음이 났다고 했다. 견학을 가서 사진을 찍는 풍경. 2019년의 일이지만,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 사진기를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는 그 광경이 떠올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맸을 텐데, 넉살 좋게 넘긴 듯하다.


2020년 12월에 나의 손톱에 대해서 썼다(https://brunch.co.kr/@mrj7b1u/552). 이제 10개월이 넘었다. 강박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내가, 손톱을 물어뜯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때를 기록해 두었던 글이다. 물론, 그 글을 쓸 당시, 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집 안팎을 방황하고 있었다.


아내와의 심각한 대화 후, 그리고 아들에게 남은 심각한 상처를 눈으로 본 후, 나는 상담 대신에 정신의학과를 선택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우울감이 있으며, 자신감이 없고, 남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가장으로서 자격지심도 가득했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상담사 앞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자신을 치료받아야 할 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빌딩 숲 사이를 헤매는 일은 쓸쓸하다. 더군다나 병원을, 그것도 정체성과도 연관된 병원을 찾아가는 길이라 더더욱 쓸쓸했다. 검사지를 받아 와서 2시간에서 3시간가량 질문에 답을 썼다. 다음 날 병원에 제출했다. 검사 결과는 의외로 빨리 나왔다. 의사는 심각한 우울증이라고 했다.


짐작은 했다. 그러나 의사에게서 전해 들으니 나를 더욱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곧이듣지 못하고 오해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는데, 이것이 조정 불가능한 수준에 다다랐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보통은 아이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쓰게 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게 마련이지만, 나는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는 점이었다. 의사도 그것을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부터가 치료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작은 알약이 10개월 하고도 20일 가까이 나의 아침을 함께 한다. 치료를 결심하고 약을 처방받던 때에 의사는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조차 심각한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해 줬다. 차라리 약의 도움을 빌려 개선해 나가고자 노력하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조언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우선 격하게 공감했고, 의사의 호언장담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셌다. 지금 이 글은 내 손톱에 관한 글이다. 내 손톱은 안녕한가? 결론은 반쯤은 안녕하고 반쯤은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강박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손톱을 물어뜯고 있으면 뜯고 있는 대로, 뜯지 않으면 않는 대로 나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손톱이 망가졌다고 우울해지거나, 손톱을 다시 길러냈다고 기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손톱을 뜯고 싶으면 뜯고 뜯고 싶지 않다면 내버려 둔다.


약을 먹고서 좋아진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내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을 나를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내가 하는 행동과 말들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시 돋친 폭언으로 전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아니, 오히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고, 아내와 다투더라도 금세 기분을 풀고 화해를 청할 수 있게 됐다.


아들에게도 지난날의 내 잘못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아들을 때렸고, 욕을 했다. 그것을 인정한다. 아들은 가끔 묻는다. 자신이 다쳤던 기억, 자신이 아팠던 기억을 말한다. 그럼 나는 아빠가 그랬노라고, 그때는 아빠가 많이 아팠노라고 솔직히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말한다.


담배는 애초에 배우지 않았고, 어설프게 배워 내 안에 괴물을 불러내던 술을 끊고, 게임도 끊고, 나는 지금 특별히 즐기는 취미가 없다. 무한도전을 계속 보고, 그것이 알고 싶다, 도시 어부를 본다. 그리고 다니엘 레이그의 007을 반복해서 본다. 그 외에는 글쎄,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영화를 볼 때,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나는 손톱을 뜯거나 안 뜯거나 한다.

일을 할 때, 글을 쓸 때에도 나는 손톱을 뜯거나 안 뜯거나 한다.

결국 나의 손톱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나도 잘못이 없었다. 손톱을, 손톱을 물어뜯는 나를, 손톱을 물어뜯는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신경 썼던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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