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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r 24. 2023

행복한 비관주의자

  콘티넬탈 호텔을 지키던 지배인이 돌연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졌다.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틀간 <존 윅>을 틀어 놓고, <분노와 용서>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이 든 키아누 형님은 정말 멋있다. 나도 저런 사람이고 싶은데, 태생이 건어물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튼 모순적인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데, 책에 스토아 철학자들의 "악을 예상하라"라는 격언이 인용된다. 언제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생각하면, 행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줄일 수 있고, 뜻밖에 일어나는 작은 행운에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 말이!'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식이 사실 스토아 철학자라는, 쉽게 말해 철저한 자기 검열과 자기반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이기도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노에 관한 나의 고민에, 주치의가 소개해 준 세네카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실천하던 나의 행복기술에 녹아 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대학 4학년 때였는가? 아니면 석사 1년 차였던가? "행복한 비관주의자"라는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일본 사람이 썼던 책인데, 정확한 제목은 아니다. 아무튼 그 책을 샀던 이유는 나의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인 물질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상황을 두고 할 수 있는 만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시험을 치고 이번 시험 성적이 최악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사람과도 반드시 헤어지고 말 것이라는 혹은 심하게 다투다가 누가 크게 다칠 것만 같은 것을 상상하는 식이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스럽고 놀랍고 행복해졌다. 그게 나의 행복기술이었던 셈이다. 나는 죽지 않았고,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분노와 용서>에서 누스바움이 동의하면서도 대결하고 있는 스토아학파(정확히는 세네카?)는 '분노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참아라. 분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상대에게 되갚아 주었다거나,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허구다. 나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다.'라는 식이다.


  누스바움은 분노는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이기에 우리 사회와 삶에 이롭지 않다고 본다. 이런 이야기들이 마사 누스바움의 책 안에 가득하다. 심지어 용서조차도 나에게 피해를 안긴 상대보다 우월한 인성을 지녔음을 표현하는 보복행위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런 내용은 나와 잘 맞는다. 이른바 정신승리? 결국, 무조건적인 사랑과 아량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는 정치철학자의 책이다. 다만 친밀한 관계, 중간 영역(사회생활)에서의 관계, 공적 정치적 관계에서의 분노와 용서에 관해서는 세네카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보충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제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뭐가 남을까. 사랑과 아량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분노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게 결론일까? 사랑하는 아내가 살해당하고, 그녀가 남긴 소중한 개마저 죽임을 당했을 때, 삶이 무너져 내린 듯한 존 윅 절망감과 분노. 그래서 실행하는 철저한 피의 복수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 철학자가 그토록 사랑하는 '법'이 사실상 무용지물인 이 세상에서, 존 윅의 분노와 복수는 오히려 통쾌한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불필요하고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말이다.


  악(부정적인 일)을 예상하며 살아온 내가, 세상의 모든 일들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좌절하거나 화낼 만한 상황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던 내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해 폭력과 폭언을 쏟아냈고 결국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누스바움과 세네카가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인간을 지나치게 "성스러운 존재"로 설정한 탓은 아니었을까. 감정적인 존재인 인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출렁이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개념으로서의 인간'을 위해 '본능으로서의 인간'을 죽이는, 그런 행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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