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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r 22. 2023

인연의 바다에 뛰어들어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문 앞에 봉지 하나 갖다 놨다고 하신다. 왜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게 편하시단다. 점심때 끓였다는 짜장과 고등어 한 마리, 표고버섯볶음이 들어 있었다.

  사실, 며칠 전에도 어머니가 문 앞에 파김치를 놔두고 가신 적이 있었다.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걸 며느리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만들어 주시고는 한다. 그날은 나에게 전화를 했지만, 주말이어서 전화기를 갖고 있지 않아 몰랐던 듯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고, 아내도 전화를 왜 하시지 않았느냐고 했었다.

  어머니는 그냥 두고 전화하는 게 편하다고 하신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갑장 친구를 위해 해 주시던 게 마음에 드셨나 보다. 어머니가 확진되었을 때도 그렇게 곰탕과 간식거리를 드린 적이 있었다. 불필요한 만남을 줄이려고 하시는 건지도 모른다. 세대 호출을 하지도 않고, 누가 들어가면 따라 들어와 놔두고 가시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방송으로 안내한 바도 있어서, 자칫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봐 걱정도 된다.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꼭 전화해서 너희 내려오라고 하니까 그게 싫다고도 하신다. 아마 우리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몰래 두고 전화하는 게 아들이나 특히 며느리를 더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시나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아들 내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어머니께 드리는 것이 없음에도 내리사랑으로 아들을 보살피는 일흔이 가까운 어머니마저도 나에게는 진정 천운이다. 늘 그렇듯,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이고 싶다.


     이따금 연구실 문 앞에 놓인 간식, 학생이나 조교가 건네는 작은 선물들, 뜻하지 않게 날아오는 메신저 선물이나 메시지.. 같은 것은 대단치 못한 내가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고 있는지 깨닫게 만든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업보를 생각하면, 이런 인연이 가당키나 할까 싶다. 예전에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부러 밀어내고, 잘라내고, 모진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며 살았다. 문 앞에 어머니처럼 선물을 두고 갔다면 그걸 버렸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면 아무도 없는 척 숨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더 심한 모욕을 주며 쫓아냈을지도 모른다. 둑을 쌓고, 인연의 바다를 막고 살았다. 그래도 지금은 인연의 바다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는 중이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빠져 죽으면 어쩌려고 싶으면서도.

  어젠가? 생일을 맞은 학생에게 커피 쿠폰을 선물해 주었는데, 아내가 "정용호 나 만나서 많이 바뀌었다"라고 말했을 때 무심한 척했지만, 사실은 맞다. 외적으로는 백 퍼센트고, 내적으로도 아내가 나를 사랑해 주는(살아내주는?) 만큼 나도 변해가는 거겠지 싶다. 가화만사성! 이 행복,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은 인연의 바다에서, 나름대로 유영하며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인연을 떨치고 살아갈 수는 없음을, 물에 빠지면 빈틈없이 물에 감싸임을 '인연의 바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많은 분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임을 밝힙니다.


갈대의 철학, <인연의 바다> https://brunch.co.kr/@networkt1mv/1009

핵복스쿨 윤정현, <인연의 바다> https://brunch.co.kr/@programa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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