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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05. 2023

빨간약을 줄까 파란약을 줄까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들은 39도 가까이 열이 났다.


  아들 병원과 할머님 빈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대로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돌아가신 직후의 모습은 봤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맞은 죽음. 처의 할머님도 마찬가지였다. 댁에 계실 때는 정정하셨던 것 같은데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결국 돌아가셨다. 옥산부락에서 울산으로 올라오는 길에 들렀던 휴게소를 잊지 못한다. 그래도 그때는 정정하셨다고 생각했기에, 너무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가벼울 수 없다는 어느 분의 말씀을 듣고, 나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중학교 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뭣도 모르고 새벽까지 빈소를 지키며 어쭙잖은 위로를 전하던 모습, 괜한 일로 다투고 말도 나누지 않다가 떠나보낸 친구. 가벼운 줄 알았던 친구의 마지막은 여섯 명이 감당하기도 힘들 만큼 무거웠다. 할아버지, 처의 조모, 고모, 숙모, 조모. 실로 많은 이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봤다.


  <매트릭스: 리저션>에서 네오(토마스 앤더슨)는 심리상담치료를 받는다. 자신이 완성한 게임 매트릭스가 현실에 침입하여 자꾸만 정신 착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건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이라고, 직장 상사(알고 보니, 스미스 요원)의 입을 틀어막는 상상은 환각이 아니라, 정서적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약을 처방해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네오는 괴로워한다. 그 이유는 약을 먹을수록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기는 그가 먹는 '파란색' 약이란 진실을 감추고 거짓되고 반복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약을 먹는 네오표정은 일그러져 있다. 네오는 살아있었던 걸까, 죽어가던 걸까.


  백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인간의 마지막은 대부분 병원에서 찾아온다. 병원은 말 그대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다. 나는 심각한 부상이나 암이 아니라면 그가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할머님이 돌아가셨던 장소, 요양병원은 정말 아픈 분들이 오는 것일까.


  요양병원은 모순적이다. 요양[療養]은 휴양하면서 조리하여 병을 치료하는 행위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요양병원에서 마주하는 노인의 모습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는 것이다. 휴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프지 않았던 분이 생기를 잃은 듯도 보인다. 주삿바늘을 꽂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으면서. 네오가 먹었던 파란색 알약처럼.


  고통스러운 세상, 당신이 좋아하던 세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을 보내신 게 아닐까. 때로는 행복했던 기억을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계속 꺼내 보이면서, 그 기억이 갖는 의미로 삶의 무의미를 극복하려고 하셨던 게 아닐까. 정작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은 부모가 반복하는 기억을 거부하고, 주사로 약으로 정지시켜 버리는 게 아닐까.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나에게, 기억을 떠올릴 수 없음은 곧 죽음처럼 느껴진다.


  문득, 어머니가 내민 쪽지가 떠오른다. 당신이 죽으면 묘를 쓰거나 납골당에 두지 말라는 유언. 남겨진 자의 몫은 죽은 자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던 나. 기억을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반박하던 나. 어머니는 그래도 그게 싫다고 하셨다.


  오늘은 밀양 삼랑진으로 향하는 날이다. 찢어질 듯 가난했던 어머니의 유년시절이 스민 곳.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 큰 발전이 없다는 곳. 그곳에 다니는 동안, 어머니의 기억을 많이 들어봐야겠다. 파란 약 삼키며 사시는 동안 흐릿해졌을 어머니의 진짜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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