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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20. 2023

애착과 집착, 그리고 습관

  시곗바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인간이 시간을 파악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시침’이 가장 아래에, ‘초침’이 가장 위에 있다. 그 사이에 분침이 있다. 이 순서가 인간이 시간을 파악한 순서다.

  애초에 ‘해시계’나 ‘물시계’ 같은 형태는 ‘몇 시’인지만 가리키는 기구였다. 가장 넓은 구간으로 시간을 헤아렸다. 그러다가 기계가 탄생하고, ‘분’을 표기하는 바늘이 개발되고, 마지막에는 ‘초’마저 표기하는 바늘을 얹었다. 초바늘을 만든 지는 정말 얼마 안 된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몇 달 전이라는 건 아니다.

  ‘초바늘’의 탄생으로 인간은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몇 시간 되었는지만으로 일의 경과나 성과를 ‘가늠하던’ 시대가 저물고, ‘분 단위’ ‘초 단위’로 성과를 ‘따지는’ 시대가 열렸다.

  ‘초바늘’은 시간의 정확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시’와 ‘분’ 단위는 이동 속도가 느려서 두 사람의 시간을 정확하게 비교하기 힘들다. 그러나, ‘초바늘’이 등장하면서는 극도로 짧은 순간마저 눈으로 목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누구의 ‘분’이 더 빠른지 누구의 ‘시’가 더 느린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판단은 결국, 한 사람의 하루가 얼마만큼 게으르고 부지런했는지마저 따지는 잣대로 자리 잡는다.      

  나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6 진동’ 기계식 시계나, ‘4 진동’ 기계식 시계를 보면서 자란 세대가 아니다. 아버지의 손목시계는 바늘 시계였지만 한 칸 한 칸 절도 있게 움직이는 쿼츠 시계였고, 내가 쓰던 손목시계도 디지털 액정으로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자란 나에게 ‘시간’은 아주 ‘정확’하고 ‘일정’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즘은 ‘시계’라고 하면 기계식 시계만을 말하는 세상이다. 쿼츠 시계를 만들던 회사들도 기계식 시계를 늘리고 있다. 가격이 오르는 건 덤이다. ‘스마트워치’는 스마트‘시계’라고 불리지 않는다. 쿼츠 시계는 진짜 시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쓰는 단순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세상 누구도 ‘쿼츠’ 시계가 진정한 ‘애호’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시계라고 부르는 기계식 시계는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아무리 정확한 기계식 시계라고 해도 하루에 1초 내외는 분명 오차를 발생한다. 5초만 되어도 준수한 편이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범용 기계들은 30초 이상씩 느려지거나 빨라지고는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계식 시계를 좋아한다.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자세가 시계의 오차로 표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시계로 충분한 동력을 얻지 못한다는 ‘동기화’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감성적인 영역이다.

  그렇다면 쿼츠 시계에는 감성적인 영역이 없는 것일까? 내 손목에서 내가 눈길을 주지 않아도 묵묵히 절도 있게 시간을 세고 있는 그 녀석은 사랑스럽지 않은 걸까? 이 부분에서 ‘동물’과 ‘식물’을 대하는 인간의 관점을 느낀다. 매일 밥을 주고, 밥을 씹어서 먹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놀아주지 않으면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거나 서운해하는 ‘동물’에게 인간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수가 많다. ‘식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만, ‘식물’이 나에게 즉각 응답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대단한 감성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식물과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응이 더딘 이를 사랑하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자동식 기계 장치를 가진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목에 얹힌 기계가 자신의 활동 없이는 활력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애착을 느낀다. 쿼츠 시계는 건전지 하나만 넣어주고 2년에서 3년은 잊어버리고 지낼 수 있다. 어차피 오차가 한 달에 몇 초 정도일 뿐이기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살필 필요도 없다. 하루에도 수 초씩 오차가 발생하는 기계식 시계는 매일 매시 매분 살펴보고 싶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애착’인지 ‘집착’인지는 모르겠다. 기계식 시계에 통달하면, 이제는 시간을 맞추지 않고도 습관적으로 찬다고 말한다. 그건 애착일까 집착일까, 아니지 ‘습’이라고 했으니 그건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람을 향한 집착과는 전혀 다르다. 흔들어야만 그 사람이 반응한다면, 관심을 쏟아야만 그만큼 나에게 반응을 보인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인 걸까? 물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습관’과도 다르다. 특별한 의도 없이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출근 전 뽀뽀를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생각하려는 노력이 작용한 결과이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습관처럼 움직이는 행동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고 본다.


  기계식 시계가 몇 점씩 되면서부터 나도 시계를 진짜 사랑할 수 없게 됐다(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쓰던 스와치 시계가 오히려 나에게는 진짜 사랑스러운 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7년 동안 내 손목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가, 한번 벗었을 때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계식 시계는 매일 손목에 올리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손목에 올리고 있으면서도 자기장에 영향을 받았을까 봐 신경 써야 하고, 내가 너무 앉아만 있었기 때문에 동력이 줄었을까 봐 신경을 써야 하고, 심한 충격으로 기계 장치가 망가지지나 않았는지 신경 써야 한다. 심지어 너무 자주 시간을 맞추고 태엽을 감아도 고장이 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일까? 애착일까, 집착일까? 알 수 없다. 심지어 나의 일상을 좀먹는 대상이 사랑스러운 대상일 수 있을까?

  하기는, 어차피 사랑은 천차만별이고, (범죄가 아닌 한에서) 자신이 믿는 대로일 테니 아무 쓸데 없는 고민이다. 나도 참 한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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