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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n 21. 2023

착해서 비굴해질 수도 있답니다

  비굴하다는 "용기가 없고 비겁함, 줏대가 없고 품성이 천함"을 가리킨다. 용기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가리키고, 줏대는 "마음의 중심이 되는 생각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비굴함은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를 타력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를 지니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불굴과 대척점에 놓인다. 

  생각해 보면, '비굴'과 '불굴'은 옛 선비의 성품을 이야기할 때나 어울릴 듯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양반의 품위와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려고 했던 모습을 고평 할 때 쓰지 않았을까.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던 백성의 모습과 스스로를 차별화하며 내세웠던 개념이 아닌가 싶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만주족, 이후 청나라)가 왕의 피난길을 물어도 가르쳐 줄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먹을 것을 얻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노인을 칼로 베어버리는 김상헌의 모습처럼 말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 회자되는 요즘, 한 연예인이 꺾이지 않는 마음은 없고, 꺾여도 그냥 하는 거라고 말해서 화제가 되었다. 뭔가를 해 보려는 마음을 다른 사람이 직접 꺾거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가졌던 마음이 꺾이더라도 끝까지 해 나갈 수 있다는 게 이 메시지의 속뜻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굴의 의지로 뭔가를 해내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두고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굴했는지, 비굴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의기양양 자신의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의심하고, 평가를 절하하고,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들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고 하자. 열심히 해 나가고 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열심과 열정이 가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의심이 결국 내면화되어 스스로를 의심한다. 결국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해 내기는 하지만, 처음의 열심과 열정은 사그라들었다면, 이 사람은 불굴일까? 비굴일까? 

  "나곳에 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모두 '곳'에 도착한다면, 그들은 불굴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비굴''불굴'을 단지 '도착지'로만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이나 찐친(완벽히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면, 결코 그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많다. 착하다는 뜻은 "(마음씨나 행동이) 바르고 어질다"이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 표현이고,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가치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가치가 과도할 때도 많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겸손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치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한 채 그를 돕고, 손해를 보고, 뒤로 물러난다. 착한 사람은 사실, 언제나 이용당한다. 착하다는 평가가 굴레가 되어, 그를 더욱 꼼짝 못 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착한 사람에 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심지어 얻지 않아야 하고), 결코 부유하지 않으며(부유할 수 없으며), 어려운 상황에 늘 처해있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말이다. 자신의 처지가 어렵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좋은 집과 멋진 자동차, 명품을 가지고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고평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착한 행동이나 언행이 "가진 것이 많으니까 착할 수밖에 없지"라는 식의 비아냥을 낳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착한 사람이 각성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할 때, 부당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취하려고 뒤늦게 줏대를 세울 때, 그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만다. 일상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말이다. 소수자의 각성은 그래서 많은 다수를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요즘 같이 물질적인 풍요가 중요하고, 부를 달성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멋진 시대에는 '착함'이라는 가치가 별로 중요하지 않지도 모른다. 착함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고정관념들이 부정적인 성격일 수밖에 없을 때, 착하게 산다는 것 자체의 부질없음만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손해 보면서 사는 착한 사람을 보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


  언젠가 착한 사람에 관해서 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라고, 나쁜 사람에 관해서는 오직 나뿐인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mrj7b1u/752

  불굴의 의지는 내가 설정한 삶의 목표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는 가장 나뿐인 사람인지도 모른다. 비굴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까지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굴종, 줏대를 꺾음으로써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된 비굴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꺾는 것 자체라면, 그의 비굴함은 착한 사람의 속성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다만, 비굴하지 않은, 비굴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타인을 배려하느라 비굴해진 사람들이 불굴의 의지를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착한 사람들의 비굴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헤아려 주어야 한다. "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에 공감한 수많은 착한 사람이, 언젠가 그 부당함에 분노하며 행동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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