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확진자수가 30~60만까지 발생되는 상황이 며칠간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환자 수가 많아질수록 그 위험에 대한 경각심은 반대로 낮아지는 추세였다. 이제는 '한집'걸러 '한집'씩 코로나 환자가 나오는 시기가 되고 있었다.
우리 집도 3월 말에 그 '한집'이 되었다.
3월 29일 화요일에 둘째 아이가, 31일 목요일에 아내가 코로나에 연이어 확진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확진자 그룹인 아내와 둘째가 한방을 쓰고, 비 확진자 그룹인 나와 첫째가 한방을 쓰는 '각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 정부 방침은 확진자는 7일간 격리하되, 미확진 가족은 외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확진자 가족이 외출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격리 지침이 완화되면서 으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는 확진된 가족을 돌보는 역할이 주어졌다. 역할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었는데, 약을 받아온다거나, 집안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가는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3월 29일부터 4월 6일까지 격리 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 가족의 잡무를 책임졌다. 그렇게 나의 4월 초는 흘러갔다.
같은 기간 동안 아버지는 수혈과 항암을 번갈아 하시면서 계속 본인의 일정을 소화하시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의 격리가 끝나갈 때쯤인 4월 5일에 아버지는 차오르는 복수 문제와, 수혈 및 항암을 위해 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셨다. 아버지는 2000cc가 넘는 복수를 뽑으셨고, 3kg에 가까운 몸무게가 빠졌다. 수혈, 채혈, 수혈, 채혈, 항암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았고, 설상가상으로 병실 내 코로나 환자가 발생해서 치료를 잠시 중단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장기간의 입원은 4월 13일까지 이어졌으니, 한 번의 항암치료를 위해 8박 9일의 일정을 소비한 셈이 되었다. 아버지의 4월 초도 그렇게 흘러갔다.
---(중략)...
아버지가 한동안 창문을 바라보시다가, 아내에게 악수하듯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버지는 아내의 손을 잡고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당시 목소리가 작고, 갈라져 있어서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잘... 살아라... 고맙다..."
후에 아내에게 들은 바로는, 아버지는 아내에게 '잘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때 본인의 삶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셨던 것 같다. 그때쯤 동생과 이모가 10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리가 있는 복도 한편에 같이 합류하였다. 모두가 모이고 나서 그곳은 다시금 눈물바다가 되었다. 어머니가 들고 오신 몇 장 안 되는 휴지를 그곳에 있는 네 사람이 눈물, 콧물을 닦는데 다 써 없애버렸다. 그렇게 병동 앞 복도에서 10 여분 간의 짧은 만남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다시 병동에 들어가실 때가 되자 동생은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를 안으며 이야기했다.
'사랑해... 아빠...'
이윽고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타고 계신 휠체어의 방향을 돌리셨고, 아버지는 등을 돌려 들어가시기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사촌 형]하고... 같이 가서... 확인 좀 해..."
사촌 형과 함께 아버지의 '묫자리'를 알아보라 하신 거다.
"예.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 걱정하지 말란 말과 다르게, 나는 그 당시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 들어가시면서 나지막이 이야기하셨다.
"이제... 오지... 마..."
그렇게 내게 오지 말라는 말씀을 또 남기셨다.
10층 병동의 유리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천천히 끄는 휠체어가 멀어지며, 다시 병동 유리문이 닫혔다. 우리 네 사람은 그렇게 유리문 너머로 멀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그 자리는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만드신 '실질적인 마지막 인사'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