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길고 길었던 겨울도 끝자락에 와 닿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서 브런치 연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항상 속이 얹힌 느낌이어서 그간 우리 가족들과 아이들의 소식을 짧게 전하고자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이 모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이 둘을 데리고 팀을 짜서 매주 일요일에 잠시 방문을 해야 했다. 코로나 19가 길어지면서 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도 이제 여든넷의 나이에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사고, 음식을 준비하고 하는 것이 힘에 부치셨는지 아이들 보고 싶은 마음도 크시지만, 자주 오지 않기를 말씀하셨다.
집 안방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머니는 집에 혼자 계신 것이 내내 불편하시다. 워낙에도 겁이 많으신 성격이셨는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집에 멍하니 있는 것도, 밤에 혼자서 잠을 청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하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집을 팔고, 다른 조용한 곳으로 모시고 싶지만, 또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당장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깝다. 우리 집으로 오시는 것은 그나마 힘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하셨고, 이제 거리두기 단계 중 직계가족은 5인 이상 집합 금지에 포함되지 않도록 조정이 되면서 이번 주말에는 우리 집에 오셔서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다가 가라고 말씀드렸다.
다만 며느리가 불편해할 것 같다는 마음에 또 마냥 편하게 계시지는 못하겠다고 하시니 나로선 참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첫째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김포는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고등학교를 지원해서 가야 하는데. 첫째는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아서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에는 갈 수가 없게 되었다. 평소 친하던 (고만고만한 공부 수준의) 친구들과 그나마도 괜찮은 고등학교를 지원해서 이제 교과서와 교복을 받아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린 고등학생 학부모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리 때만 해도 새벽에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여섯 시 이십 분에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갔었고, 어머니는 그것보다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주셔야 했는데,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일주일에 4~5번씩 도시락을 싸주셔야 했던 어머니께 매번 반찬투정을 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여러모로 감사한 시절에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만 한다.
아참, 첫째의 사춘기는 어느 순간부터 지나간 느낌이다. 물론 여전히 방은 어지럽고, 방 밖으로의 외출도 없고, 대화도 많지는 않지만 얼마 전 엄마의 생일날, 식탁 위에 무심히 놓아둔 엄마의 생일이 새겨진 하얀색 목도리 선물이 그 신호탄이었고, 예전과는 다르게 대화를 해도 짜증보다는 웃음이 많아진 것 같다.
둘째는 이제 6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지만, 코로나 19로 대회가 없고, 축구클럽의 운영도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여러 번 변화가 되어 자기 말에 의하면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코치님도 대회를 통해서 한번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순간에 코로나가 터져서 정말 너무너무 안타깝다고 하셨으니, 이제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에 와서 앞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순간이 온 것 같다.
사춘기가 와서 자주 짜증내고, 대들고, 기름지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둘째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축구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이 아이가 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수준의 믿음이 있어서 걱정보다는 기대가 되는 아이이다.
다만, 부모로서 더욱 든든하게 서포트해주고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부족한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셋째는 이제 7살, 유치원의 형님이 되었다.
사실 모든 시계는 셋째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김포로 터를 잡은 후 막내가 태어났고, 그래서 막내의 나이가 곧 우리 가족이 김포에 온 시간이자, 뭔가 어지러웠던 시절을 이겨낸 시간과 같다. 비록 유치원에서 하는 것이지만, 한글도, 숫자도, 그리고 약간의 영어도 배우고 있는 막내가 참 신기하다. 여전히 말은 잘 안 듣고, 눈치는 빤하고, 누나와 형을 무시하는 놈이지만, 그래도 집안의 사랑은 독차지하는 편이다. 아마 오래도록 철이 들지 않겠지.
막내가 나이 먹는 만큼, 내가 늙어가는 것 같고, 그만큼의 시간이 아쉽고 아쉽다.
아버지의 생각은 여전하다.
많은 분들께서 아마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고, 그리울 거라고 조심스럽게 조언해주셨는데, 정말로 그랬다. 사실 아직도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없는 게 어색하고, 또 아버지가 그렇게 가신 게 억울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집에 있을 땐 둘째가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들을 많이 이야기한다. 할아버지가 등을 긁어주던 것, 백화점에 가서 장난감을 사던 것, 주말에 본가에 놀러 갔을 때의 거실 같은 자잘한 기억들을 함께 조곤조곤 나누곤 한다.
또 본가에 가면 어머니와 옛날 세 식구 살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관한, 혹은 우리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이런 시간들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나의 사업은 계속해서 확장 중에 있다.
나는 애초에 사업이 성공해서 일확천금을 얻는다거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끗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청사진에 없다. 다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세 아이들을 위해서 부족함 없는 서포트를 해주고 싶다. 원하는 것들을 사줄 수 있고, 원하는 곳에 데려다줄 수 있고,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가정교육을 해주는 것, 풍족한 의식주가 받쳐준다면 더 좋은 것이겠지만, 그것은 으레껏 따라오겠지 싶다.
내 나이 올해로 마흔여섯이다. 아버지의 마흔여섯을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멀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따라잡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