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알바니아 사란다
사란다의 거리는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때론 지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꽤나 냄새에 민감한 나로서는 거리 곳곳 피어나는 쓰레기 냄새에
사란다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인지 사란다에서는 밖을 돌아다니는 일보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
아침이 밝아도 어딜 가야 한다는 특별한 계획 없이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잠을 자고, 또 잔다.
무언가에 이끌려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
그것도 여행이 좋은 이유다.
일어나서 곧장 냉장고로 향한다.
점심으로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을 하며 냉장고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부엌이 딸린 집은 집밥으로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문득, 엄마에 대한 감사함이 새삼스레 고개를 내민다.
배고플 시간이면 알아서 차려지던 식탁.
그 뒤에서 바삐 움직이시던 엄마의 수고를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죄송스럽게도 당연하게 여겼나보다.
엄마이기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역할인 줄만 알았다.
엄마니까, 엄마라서.
냉장고 속에 놓인 자투리 식재료들을 보고있으니
부끄러웠던 철 없는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따뜻한 밥 한끼를 차려드려야겠다며
고마운 엄마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부랴부랴 있는 재료들을 꺼내보니 꽤나 푸짐하다.
감자, 양파, 대파, 참치 1캔,
그리고 한국에서 고이 모셔온 고추장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줄 라면수프까지.
이 정도면 고추장찌개를 끓이기에 제격이다.
5년 전 배낭여행을 떠나와서는 한식을 그리워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벌써부터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그립다.
설레는 마음으로 감자 참치 고추장찌개를 끓인다.
먹기 좋게 토막 낸 감자를 냄비에 넣고
참치 캔을 아낌없이 들이붓는다.
양파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물을 붓는다.
고추장을 한 움큼 짜내면 벌써 그럴듯한 색이 나온다.
냄비가 팔팔 끓어 올라오면 간을 본다.
약간 심심한 간을 비밀 수프로 맞춰본다.
역시 라면수프만큼 한식이 그리울 때 아쉬운 마음을 잡아주는 건 없나보다.
마지막으로 송송 썰어놓은 대파를 넣어 끓여내면 끝.
갓 지은 냄비 밥을 한 공기 가득 담아 고추장찌개 앞에 가져다 놓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르다.
알바니아에서 고추장찌개라.
기가 막힌 점심이 아닐 수 없다.
한껏 들뜬 채로 맛을 본다.
뜨끈한 국물이 입천장에 닿으니 순간 한국이 스쳐 지나간다.
전날 과음한 것도 아니건만 속이 풀리는 이 기분.
뼛속까지 한국인인가 싶어 진다.
찌개를 밥에 비벼 한 공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비워냈다.
다 먹은 그릇들은 곧장 설거지통으로 향한다.
뜨끈한 점심을 배불리 먹고는,
아이스커피를 타며 창가를 바라본다.
따뜻한 음식은 따뜻한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음식에도 음악처럼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다 같이 둘러앉아 먹던 따뜻한 요리들,
따뜻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외롭진 않지만 문득 한국이 그립다.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나마 추억할 수 있는 음식이 있어
나름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아이스커피가 참 시원하고 좋다.
8월 어느 날,
뜨거운 햇살이 사란다를 데우는 오후.
고추장찌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리운 마음을 데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