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알바니아에서 몬테네그로
아침부터 부랴부랴 베라트를 떠날 채비를 하고 나왔다.
이래저래 편의를 많이 봐주어 감사했던 호스텔 사장님과 매니저님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하루 종일 이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 마음을 눈치라도 챘을까.
짐이라도 하나 덜어줄까 하고는 선뜻 커다란 가방 하나를 집어 들고 내려가신다.
어쩌면 괜한 호의였다는 생각이 드셨을지도 몰랐다.
가파른 언덕에 무거운 가방까지 더해지니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언덕 밑에 다다르자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벌게진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하신다.
기어코 끝까지 도와주신 마음에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해 멀어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손을 흔들었다.
정직한 택시 기사님을 만나 티라나로 향하는 버스정류장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런 실랑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내리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은 감사할 일이 되곤 한다.
낯선 이방인에게 제일 어려운 건 알면서도 부풀려진 택시비를 낼 수밖에 없는
답답하고 씁쓸한 순간일지 모른다.
타고 가야 할 버스에 짐을 실어놓고는 기분 좋게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런, 찜통이다.
사란다에서 베라트까지 넘어오는 작은 버스에서도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운 채 에어컨이 아닌 조그만 창문을 열고 달렸건만.
이번에도 에어컨이 영 힘을 못 쓴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 더운 바람이 구석구석까지 끼어들어오는 찜통 버스라니.
더위에 멀미에 제발 그것만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어떤 극한 상황도 버티려면 또 버텨지나 보다.
어느새 숨 막히는 2시간이 흘러 간신히 티라나에 도착했다.
서둘러 내려 시내로 나가기 위해 택시를 잡던 도중 우연히 일본 여행객 한 분을 만났다.
택시 잡기가 어려우셨는지 함께 타고 갈 수 있겠냐며 말을 걸어오신다.
선뜻 함께 가기로 하고 역시나 더운 택시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여자 혼자 배낭여행을 하시는 듯해 말을 건넸다.
그분은 휴가로 1주일간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단 1주일의 휴가를 이렇게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메고,
정보도 많이 부족한 동유럽의 작은 나라들을,
그것도 혼자 여행을 하고 계시다니.
같은 여행객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버텨내는 어려움과 고단함을 알 것 같기에
그 용기와 의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꼭 한 번 이 여행의 마지막 언저리에 일본을 가보겠다고,
그러자 일본에 오거든 꼭 한 번 연락을 하라며,
반가웠던 마음을 담아 서로의 명함을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달려온 택시기사가 뜬금없이 2천 레크(원화 2만 원 정도)를 부른다.
무슨 뚱딴지인가 싶어 말도 안 된다는 듯 강하게 밀어붙이자
택시 기사가 다시 절반을 외쳤고, 나는 그제야 주섬주섬 지갑을 열어 돈 꺼낼 채비를 했다.
그 와중에 옆에서 거들어주시던 일본 여행객분께서
아직도 터무니없는 택시비를 결국 600 레크까지 낮춰놓으신다.
얼마가 제값인지는 몰라도 알바니아 여행을 하는 동안 체감한 물가로 어림짐작 해보건대
600 레크도 꽤나 많이 받은 값이다.
다행히 함께 탄 일본 여행객분 덕분에 허투루 나갈 뻔한 돈이 굳어진 셈이었다.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우리는 또 다음 만날 날을 기약했다.
버스를 타야 할 곳의 위치를 확인해두고는
남은 레크를 다 정리하기 위해 시원한 커피 한잔과 함께 간단한 간식거리도 사본다.
이제 몬테네그로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 알바니아는 안녕이다.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매하고 버스로 향한다.
그동안 탔던 알바니아 버스 중 가장 훌륭한 최고급 시설을 자랑한다.
4시간을 달려야 하는데 슬쩍 마음이 놓인다.
버스를 타고 3시간쯤 달렸을까.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국경에 다다르자 다들 긴장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스에서 지로카스터르로 넘어올 때 이미 경험한 바 있지만
국경심사는 아주 기다리는데 숨이 막힐 정도이다.
타이밍이라도 빗나가는 날이면 꼼짝 못 하고 그곳에서 반나절을 날려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감사하게도, 연륜 넘치시는 버스 기사님을 만나
30분도 채 안 되는 기적적인 시간 안에 국경을 넘었다.
이런 행운에도 소름이 끼칠 만큼 행복할 뿐이다.
알바니아를 여행한다면 내 운이 얼마나 좋은지는 버스에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렇게 30여분을 더 달려 몬테네그로 수도인 포드고리차에 무사히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늦은 탓에 반갑게 '택시'를 외쳐주시는 분을 따라 짐을 싣는다.
뭐든지 급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저렴하다던 몬테네그로 택시비에서 또 바가지요금을 내고 말았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제 값을 받아보려 했으나,
너무나도 단호한 택시 아저씨의 눈빛에 그만 지고 말았다.
기필코 다음에는 제 값을 받으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내린다.
어둑어둑해진 포드고리차의 밤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호스트 아주머니.
오자마자 택시비를 얼마 주었느냐고 물어보신다.
표정만으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기에 충분했을지 몰랐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 주시곤 다들 똑같은 스토리를 가지고 들어온다며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신다.
매번 미리 알려줘도 결국 좋은 택시 기사분을 만나지 못하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아주머니와 함께 두런두런 얘기를 마치고서는
그제야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좀 쉬어본다.
포근하게 받쳐주는 소파에 몸이 스르륵 녹아내린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기 시작해 다시 편히 앉아 있는 지금 시각은 밤 11시다.
장거리 이동에 좀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정신력은 잡아도 체력은 한계가 있나 보다.
긴장이 풀리는지 몸도 마음도 한없이 풀어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루를 보내기엔 아쉬웠는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을 밤 산책으로 달래 볼 겸 밖으로 향했다.
12시가 다 되어가지만 메인 광장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시원한 밤바람을 맞는 이들로 가득하다.
밤이 어두워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가게들은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이 곳 저곳 하나도 빠짐없이 둘러봐야지, 라며
벌써부터 새로운 곳을 향한 열정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롭고 낯선 것들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재미를 가져다줄지,
내일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게 될지,
낯선 곳이 주는 신선한 설렘이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는 이 밤
살며시 상기된 얼굴을 안은 채 하루의 긴 여정을 달래며 깊은 잠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