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끝을 바라보고 서 있다

#16.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by bonita


근처 문구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수첩을 하나 샀다.

인터넷도 잘 되어있고 노트북에 핸드폰까지 있지만

가끔은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끄적거리고 싶어 질 때가 있다.


한 번 손을 뻗으면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버리기에

쉽게 지워지지도 않고,

다시 고쳐 쓰기도 어려워 더 정성을 쏟는지도 모르겠다.


그 수첩에 지워지지 않을 여행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손에 꼭 쥐어 나온다.



여전히 햇볕이 내리쬐는 포드고리차.

특별할 것 없는 거리를 걷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에 좋은 카페로 들어섰다.


아이스커피를 시켜놓고 수첩을 열어

하나둘 마음 가는 대로 이 순간을 그려본다.

까만 잉크가 부드럽게 하얀 종이에 스며들었다.


이 느낌, 참 좋다.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끝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허무하기 마련이다.

끝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은 그것에 온전히 내 맘을 실어놓지 못하게 만든다.

끝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끝을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

한 달에 혹은 1년에 한 번씩 떠나는 휴가가 온전히 즐겁지만은 않았던 이유,

다가오는 주말과 일요일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이유,

아마도 그 끝이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길지 않은 이 달콤한 휴식이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갈 거란 걸,

그 달콤함이 너무 짧아 지나간 자리가 더 쓰디쓴 시간으로 채워질 거란 걸,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의 여행도 분명 그 끝은 존재한다.

다만, 이전의 끝과 지금의 끝은

같은 여행일지라도 다음 발걸음을 향한 모습만은 같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정해진 기간이 흐르고 나면

자연스레 끝나는 여행이 아

내가 이어가는 동안은 하루하루가 여행의 연속이며,

이 여행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는 내 의지에 따라 수만 가지로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여행의 끝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내 인생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처해진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하고 또다시 만들어 지기도 한다.


떠나지 않고 느낄 수 있는 건 없으며,

시도해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부딪혀 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오늘 하루,

문득 떠나 온 낯선 곳에서의 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는 내가 기특하기만 하다.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적힌 세탁기에

옷과 세제를 부어 넣고 꾸역꾸역 빨래를 돌리고,

제대로 정해진 버스 정류장 하나 없는 곳에서도

물어물어 다른 도시로 떠나는 버스를 타고,

무거운 배낭을 어느새 내 몸처럼 가뿐하게 들고 다니는 나를 볼 때면

이 여행,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끝이 보이는 여행이든,

끝이 보이지 않는 여행이든,

중요한 건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순간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느냐가 아닐까.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한낮의 해를 피하러 들어온 거리의 한 카페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또 하나 쌓아가고 있다.




브런치네임카드.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