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점심이 지난 나른한 오후.
책을 들고 햇살이 내려앉은 테라스로 나간다.
여행을 떠나오면서 챙긴 책 한 권.
몰랐다.
여행을 하는 내내 책이 나에게 이토록 큰 위안이 될 줄은.
누군가의 깊은 이야기를 끝없이 곱씹고 되새길 수 있는 힘이 이토록 용기가 되어줄줄은.
여행을 떠나와서 책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니,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머리가 복잡한 날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날에도.
시원한 바람에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은 날이나,
푸른하늘에 하얀 구름이 예쁘게 피어있는 날,
집 앞에 예쁜 테라스가 놓인 카페를 발견한 날에도,
책을 꺼내 읽곤 한다.
책을 꺼내 한 장, 두 장 넘긴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맞춰
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이 스며들고,
의자에 몸을 기대니,
공기마다 채워진 여유로움이 눈 앞으로 다가온다.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무거워도 꾸역꾸역 이 먼곳까지 책을 들고 올 수밖에 없던 거다.
손에 잡히는 빳빳한 종이의 질감을 만지고,
넘어가는 책장을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와 함께,
나는 먼 곳에 있는 낯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곳에 있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은 언제나 흥미롭다.
복잡하고 무료했던 시간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장소와 낯선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찬다.
오후 4시의 류블랴나는 서늘한 바람이 오고 간다.
머리칼을 흔드는 차가운 바람에 겉옷을 여민다.
싱그러운 가을바람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한 때.
아직 조금 남아있는 찬바람을
따뜻하게 끓인 커피 한잔으로 녹인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뜨뜻하게 데워진 잔을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커피의 향만큼이나
향기롭게 나를 감싸 안는다.
커피를 마시며 건너편 테라스를 바라보니
동그란 테이블 위로 포근한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 햇살이 좋아요, 잠시 밖으로 나와 보세요"
마음속으로 외치는 말에 커튼이 쳐진 문 밖으로
누군가 손을 흔들며 나올 것 같은
따뜻한 상상을 해본다.
4층밖에 안 되는 높이에서도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류블랴나.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
붉은빛 지붕들이 하나 둘 자리를 채워넣는다.
오늘 같은 날.
내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날들이
몇번이나 있었을까.
잠시 멈춰 서는 게 어쩜 그토록 불안했을까.
왜 쉴 때마저도 머릿 속은 까맣게 채워져 있었을까.
잠시 천천히,
더 높이 뛰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을
낭비로 여겨지지 않는 가벼운 마음을 채워보자.
괜찮다고 다독이며 스스로에게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단단한 믿음을
건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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