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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Oct 31. 2016

마지막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으면

#43.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성

류블랴나에서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류블랴나의 모든 모습을 꽉꽉 채워 넣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메인광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토요일 아침, 메인광장의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한쪽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한쪽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 하늘을 가득채운 투명한 비눗방울들이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뽀글뽀글 톡!

눈 앞에 나타난 반짝이는 비눗방울을 잡고싶어 해맑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방울방울 하늘 높이 올라가는 비눗방울을 보고 있으니, 나도 그 비눗방울을 따라 동심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마음.     

어쩌면 동심은 작은 것에도 움직이는 마음이 아닐까.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야 했다.

흔들린다는 건, 곧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만이 어른의 표상인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동심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곳에 있는 우린 지금 모두 얼마나 행복한가.

바람따라 햇살따라 흔들리는 마음이 있어

그 얼마나 행복한가.     


햇살 아래 반짝이는 투명한 비눗방울이 하루를 열어주는 류블랴나.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올드타운 뒤로 돌아가

한쪽에 시장이 리고 있었.

과일가게, 채소가게 등 다양한 식재료를 팔고 있는 곳에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물건을 들었다 내려놨다하며 정겨운 소리가 오고가고 있다.


시장은 그 도시의 살아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다.

    

색다른 식재료의 냄새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까지.

잘 익은 과일을 고르고 향긋한 식재료를 찾아 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설렘도 담겨져있으리라.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까지

푸근한 따뜻함으로 채워진다.  

마치 어디에선가 누군가 나를 위해

설레는 마음을 가득 실은 채 싱싱한 재료를

고르고 있을 것만 같다.


특별한 것들만큼이나 익숙한 모습들은

가끔 이렇게 예기치 않은 감동을 주곤 한다.

그렇기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다가오는 감동은 조금 더 오래 머무는지도 모르겠다.

반대쪽으로 걸어가니 한껏 화사한 색깔을 뽐내고 있는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다.

이 꽃들이 전부 나를 위해 피어있는 거라면 어떨까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향기로운 꽃냄새에 취해본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꽃 한 다발을 사 오는 그 사람.

꽃이 너무 예뻐서,

그 꽃만큼이나 꽃을 보고있는 너가 너무 예뻐서,

가장 예뻐 보이는 보라색  한 다발 샀다고 한다.


오늘 하루가 기분 좋은 일들 채워졌으면

건네 그 사람의 마음이 고마웠다.     

선물 받은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거리를 걷는다.

아무런 기념일도 아닌 날,

꽃을 한 다발 들고 많은 사람들 속을 걷고 있으니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축하를 건네받을 것만 같다.     


류블랴나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시간 속을 걸을 수 있었을까.

류블랴나남은 하루가

조금 더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

친절하고 넉넉한 사람들,

보는 사람까지 미소 짓게 만드는 환한 웃음들.


그들과 함께 같은 곳을 걷고 있

사실만으로도

슬로베니아에 오길 참 잘했다.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 걷는다.

해가 지지도 않았건만 푸른 하늘에 밝은 햇살이 마치 조명처럼 한낮의 낭만을 더한다.


마지막 날인 만큼 류블랴나 성에 가보기로 했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자 소박한 류블랴나의 시내가 눈 앞에 펼쳐진다.

성을 둘러보다 우연히 예배당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조그만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고오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작은 테이블 위에서

정성스레 무언가를 적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꽤나 여행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듯해보였다.

돈 한푼 받지 않으시고 이름의 알파벳 하나하나를 중세의 문자로 새겨시는 장인.

우아하고 깊은 매력의 중세문자는

보고있는 내내 말을 잃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정중히

내 이름도 하나 부탁을 드렸다.

정성스레 적어주신 이름 뒤에

슬로베니아와 본인의 이름까지 적어주신다.     

낯설어 보이는 중세문자로 적힌 내 이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본다.

'내 이름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새삼 깨닫는 아름다움에 어찌나 감동스럽던지.

감사의 표시로 싱그러운 꽃 한 다발을 건네드린다.


꽃을 좋아한다며 웃으며 받아주시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내 이름과 슬로베니아가 적힌 종이를

손에 꼬옥 쥐고 내려온다.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엔 말로 다 할수 없을 만큼의

진한 감동과 사랑이 새겨져있으리라.  

다시 시내로 내려오자 슬슬 허기가 몰려온다.

근처 수제버거집으로 들어가 시원한 하우스 라거 한 잔을 시켰다.

갈증 난 탓에 벌컥벌컥 들이켜다 눈이 번쩍 뜨인다.


맥주 맛에 이렇게 감탄이 나왔던 적이 얼마만인지.

어쩜 우연히 들어온 가게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이

이토록 달콤한건지.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고급스럽게 풍기는 씁쓰름한 향에 한번 취하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맛에 한번 취하고

빈티지한 가게의 분위기에 또 한 번 취하는 오후.

똑같은 도시를,

심지어 아주 작은 도시를

이렇게 매번 다르게 느낄 수 있을까.


사랑스러움이 매번 내 마음을 흔드는 류블랴나.

일주일을 보내도 아쉬운 마음만 가득한 류블랴나.


아직 해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공원에서 하루종일 자전거도 타봐야 하고,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싸들고

피크닉도 가야하고,

강이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해보고 싶었다.


그 많은 시간들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아직도 못 해본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마지막이라는 하루는 점점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발걸음은 하염없이 무거워지고만 있다.

천천히 걸으면

조금 더 하루가 길어질 수 있을까.

여행을 하는 동안

더 궁금하고, 더 알고 싶고, 더 느끼고 싶다는

미련을 가져다 준 나라는

슬로베니아가 처음이었다.


사실은, 한번쯤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겠다.     

이 나라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저 동상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저 건물은 얼마나 오래된 건물일까.

이 곳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을 다 풀고 가기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여행자이지만

언젠간 떠나야 하는 여행자이기에

오늘은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을 만큼

마음을 빼앗긴 곳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를 고이 담아놓는.


그 아름다움이 혹시라도 닳을까

입 밖으로 꺼내기도 아까웠던 나라.

어떤 글로도 그곳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다 전하지 못할 것 같아

글 한 줄도 쉽사리 시작하지 못하는 나라.

마지막이라고 적으면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그 끝을 적고 싶지 않았던 나라.


슬로베니아는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나라이다.     

안녕, 류블랴나.

안녕,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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