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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Nov 01. 2016

우리는 무엇을 여행이라 말하는가

#시간이 넘쳐 또다시 잡생각에 허덕인 날

류블랴나에서 보낸 1주일간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뒤로한 채

헝가리로 향하는 날이 밝았다.     


오랜 시간 풀어놓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그 무게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

떠남의 무게를 실감 나게 하기라도 하려는 걸까.

어깨에 멘 가방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묵직한 발걸음을 떼며 이른 아침 버스를 탔다.

주말인 탓에 1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를

몇 걸음 늦었더라면 놓칠 뻔했다.

아침 7시부터 뜻하지 않게 뛰고 또 뛰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8시 반 기차를 타고 헝가리로 출발한다.

그럼에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6시가 넘는다.

장장 9시간의 기차여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서둘러 준비한 덕분에 여유롭게 6인실 쿠페에 자리를 잡았다.

빈자리가 가득한 기차가 어색할 만큼 기차는 작고 단출하다.     


비어있는 자리에 짐을 풀고 있으니

곧이어 앞자리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질끈 묶은 머리에 무거운 가방을 끌고 두꺼운 안경을 쓴 그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책을 꺼낸다.     



햇살이 따스하게 창 안으로 스며들자 나른한 온기가 차올랐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몸을 의자에 기대고 나니 그제야 답답했던 숨을 한가득 몰아내 쉰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평온한 전원마을의 풍경들.


나는 지금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있다.


우린 왜 여행을 떠나오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여행이라 말하고 있는걸까.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좋아서 떠난 여행이건

왜 가끔 그토록 힘이 들고 지치기도 하는 건지.


누군가는 무조건 여행은 즐거워야

떠날 맛이 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즐거워야 여행이지.

하지만 즐겁지 않아도 여행이다.     


가끔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며칠간 즐기는 꿀맛 같은 휴가도 여행이고,

내 키만 한 배낭을 메고 곳곳에 파스를 붙여가며 

기차역에서 밤을 새우곤 하는 것도 여행이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인생이 20km로 달린다면

때론 여행은 60km, 혹은 100km를 넘는

속도로 달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종종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힘이 들기도 하고,

숨이 막힐 만큼 지치기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속상할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여행이기에

가끔은 죽도록 행복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만큼 떨리기도 하고,

잊지 못할 꿈같은 시간 속에 머물기도 한다.


인생이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것처럼,

언제나 웃을 일만 가득할 수는 없는 것처럼,

여행도 어쩌면 마찬가지 일지 모른다.

 

여행의 매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걸어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에 힘들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 힘든 순간을 묵묵히 걸어 거다 보면

또다시 즐거운 순간과 마주하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조금 더 명확히 그려가고,


낯선 나와 마주하며 덮어두었던 스스로의 모습을

하나둘 찾아가는 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조건 없는 선물이 아닐까.     



쾌락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떼어놓지만
여행은 자아를 찾아가는 고행이다.

 -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 -


여행이 무작정 좋아 나는 매번 가방을 챙긴다.

왜 그렇게 여행을 떠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몰랐던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이 좋다고.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좋다고.   

  

복잡한 일상으로 얽힌 곳에선

내가 나와 마주하는 것 조차도 어려워질 때가 있다.

그렇게 내 자신이 무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

내가 사랑하는 일과 꿈 그리고 내 자신.

그 안에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떠나오면 보일 때가 있다.

 


달리는 창가를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를 한잔 마신다.

어느새 부다페스트로 들어온 기차 밖으로는

붉게 물든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다 

결국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아본다.     


낯선 존재도 무뎌졌던 일상의 회복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면,

인생에 이토록 낭만적인 순간들이

채워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떠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매일 아침, 알람이 아닌

설레는 마음만으로도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분히 떠날 수 있게 만들지 않을까.     



이토록 떠나기에 충분한 이유가 가득한

여행이라는 길 앞에서도,

가끔은 내가 잘 떠난 온 걸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떠나오기 전과 무엇이 달라져있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무언가 분명 달라지겠지만

그게 무엇일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려놓은 그림대로 맞추려고 하다 보면

지금 여행을 하는 이 순간이

흔들려 버릴 것만 같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나도 모르게 다시 겉돌고 있을 모르겠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막연한 질문을 품고 있기에 

어쩌면 오늘도 여행을 하고있는 게 아닐까.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또 다른 낯선 것들과

마주하며 그 속에서 낯선 나와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주는 막연함과 불안은 무겁지 않다.

적어도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오늘이 여행이 때문일 것이다.



때론 무작정 불안한 순간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조금씩 뚜렷해져 간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마주하게 될 내 모습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지를.

완벽하지 않지만 어리숙하진 않은,

단단한 믿음 위로 다시 기차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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