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폴란드 자코파네
자코파네로 넘어가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어느새 내리던 빗방울이 눈송이로 변했다.
이미 나뭇가지에는 살며시
하얀 눈들이 내려앉아있다.
갑작스러운 눈발에 놀랄 새도 없이
자코파네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려 짐을 꺼내고 나니
온 동네엔 새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10월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짙은 한겨울의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차가운 기온에도 이상하게 마음만은 춥지 않았다.
매섭게 몰아치는 것처럼 보이는 눈발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달라붙는 눈바람을 거둬내며
호텔 앞에 다다랐다.
포근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호텔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럽지 않은
소박하고 정겨운 따뜻함이 배어있었다.
무엇보다 그 아늑함이
자코파네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제대로 겨울이다.
예상치 못한 겨울 날씨에
있는 옷들을 최대한 껴입고 나온 덕분인지
생각만큼 춥진 않다.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한겨울의 풍경들.
이런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그저 재미있어 자꾸만 웃음이 난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자코파네의 거리를 걷는다.
어느 깊은 산골에나 있을 듯한 오래된 산장처럼 뾰족한 지붕의 집들이
마치 장난감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동네도 사람들도
모두 순수하고 정감이 넘칠 것만 같은
그런 따뜻하고 정겨운 마을.
온 세상이 하얗게 채워지는 이곳.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아무런 걱정 없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눈이 내리면 지하철이 붐빌까 걱정을 하고
구두를 신은 발이 걱정 되고,
차갑고 축축해지는 것들이 싫기만 했었는데.
그땐 왜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들을
조금 더 천천히 느끼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메마르게 만들었을까.
문득 장갑을 끼고 커다랗고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지는 순간이다.
허기진 배와 함께 따뜻한 온기도 채울 겸,
거리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선다.
눈 내리는 모습이 잘 보이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몇 가지 요리와 폴란드 전통 수프를 하나 시킨다.
한국의 닭고기 국물보다 조금 더 깊고 진한
느낌의 수프는 짭짜름하고 고소한 맛이
꽤나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수프 한 숟가락에
살짝 얼었던 몸이 그새 녹아내린다.
문득 창가를 바라보니
더 굵어진 눈발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아무 말없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트리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내 마음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붕과
그 옆에 길쭉이 서있는 나무들에도
이미 하얀 눈이 겹겹이 쌓였다.
포근하고 정겨운 시간들로 채워진
기억의 언저리를 더듬는다.
투박한 할머니의 손이 생각나기도 하고,
가족들과의 따뜻한 저녁식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함께 군고구마를 먹던 친구가 생각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았던 그날이 생각나기도 하고.
식당 안에선 진한 재즈풍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음식도 좋고, 노래도 좋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저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추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와 떨어지는 눈 외엔
모든 것들이 잠시 지워져도 괜찮을 것 같다.
잠시나마 창문을 가득 채우는 하얀 눈발에
칙칙했던 모습과 무거운 생각들을 내려놓는다.
새하얀 눈이 그 모습들 위로 스르륵 덮인다.
그렇게 눈의 힘을 빌려
조금은 지우고 싶던 지난 날의 순간들과
새하얀 작별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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